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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에서 교회와 국가는 천상의 왕국을 지상에 반영한 것으로 간주되는 단일한 그리스도교 제국의 본질적인 양측면으로서 뗄 수 없는 연관을 지녔다. 따라서 유스티니아누스에게는 후대의 비잔티움 황제들이 그랬듯이 교회의 선정을 진작시키고 정통적 교리를 고수할 의무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가 제정한 법률들의 많은 부분이 종교문제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이교와 이단, 사마리아인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고전시대의 유산을 충분히 존중하는 식견이 있었지만 한때 유명했던 아테네 아카데미에서 이교도 교사들을 추방했는데 이는 그리스 철학보다는 이교사상을 겨냥한 조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마주친 주요한 교리문제는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인정받은 정통설, 즉 그리스도 안에 신과 인간의 본성이 공존한다는 견해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단성론의 견해 사이에 빚어진 갈등이었다. 단성론은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강력하게 대두했으며 민족의식의 성장 및 비잔티움 통치에 대한 불만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부인 테오도라도 단성론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방 속주들을 잃고 싶지 않았지만 반면에 그들에게 양보할 경우 거의 틀림없이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나 서방 쪽과 멀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정통적인 서방 주교들에게 단성론 주창자들과 타협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심지어는 비질리오 교황을 콘스탄티노플에 억류했으며 안티오키아의 중요한 교회인사들이 쓴 몇몇 글들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는 최종적으로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안티오키아의 수상쩍은 글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는 단성론 주창자들을 무마하지 못했고 안티오키아의 교사들을 공격해 그곳 사람들을 노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비질리오 교황에 대한 대우와 교리문제를 결정하려는 시도로 인해 로마를 격앙시켰다.
재위 말년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는 공적인 일에서 한 걸음 물러나 신학적인 문제에 몰두했다(→ 아프타르토 가현설). 심지어 그는 이단에 빠져들어 564년말에 그리스도의 신체는 결코 썩지 않으며 십자가에서는 단지 고통받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아프타르토 가현설). 이에 즉각적인 항의가 일어났으며 많은 성직자들이 그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황제가 죽자 없던 일이 되고 565년에 그의 조카인 유스티누스 2세가 제위에 올랐다.
교회문제에 유스티니아누스가 관심을 갖고 활동한 것을 황제교황주의(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는 입장)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후대의 비잔티움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부섭정으로 여겼고 동로마제국에서는 라틴계의 그리스도교국에서 그랬던 것과는 달리 교회와 국가 사이에 명백한 구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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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교회정책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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