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BC 323년 바빌론에서 열병으로 죽은 다음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고 BC 198년에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정복되었다.
두 왕조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도시에 사는 부유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갔다(헬레니즘 유대주의). 대제사장 야손(BC 175~172 재임)과 메넬라우스(BC 162 죽음)가 헬레니즘 전파에 앞장섰다. 마침내 BC 167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를 금지하고 이 금령을 어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심하게 박해를 가했다.
이에 마카베오, 일명 하스모네 가문에 속하는 제사장 마따디아와 그의 5명의 아들이 봉기하여 164년 12월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제사를 드렸다(I마카 4:36~40). 이를 기념하여 유대교에서는 유대력으로 기슬레브 달 25일부터 8일 동안 성전봉헌 축제(하누카)를 지낸다. 하스모네 가문 중심의 독립전쟁이 차츰 승리하여 마침내 하스몬 왕조(BC 142~63)가 수립되었다.
독립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하스모네 가문은 그만 과욕을 부려 정권과 대제사장직을 독식하는 잘못을 범했다.
마따디아의 넷째 아들 요나단(BC 160~143 통치)은 독립군 사령관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대로 대제사장을 배출한 사독 가문을 제치고 BC 152년 대제사장 직분까지 겸직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독립군에 가담하던 경건자들(하시디즘)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요나단을 지지하는 경건자들이 바리사이파를 만들고, 그를 반대하는 경건자들이 에세네파를 만들었다.
이당시 이스라엘 종파의 성격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바리사이파는 경건한 평신도들로서 〈구약성서〉 못지않게 조상들이 구전으로 전해준 전통도 존중했다. 이들은 성서와 구전의 계율을 다 지켰다. 또한 이들은 섭리, 천사, 내세에서의 보상,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 왕 치세 때 바리사이파는 6,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2번째로 쿰란 종파가 있다. BC 152년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하자 제사장이던 '의로운 스승'은 저항하다가 모진 박해를 겪었다(하바꾹 주석 8:8~13). 요나단의 조카 요한네스 히르카누스가 통치할 무렵(BC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의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데리고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으로 가서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 치세 때(BC 103~76) 매우 번창했으나, AD 68년 6월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사악한 제사장들이 봉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막에 살면서,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하여 다윗 계통 임금 메시아와 사독 계통 제사장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본래 제사장들이 지키던 정결법을 철저히 준수했다. 성교와 사정에서 생기는 불결을 피하려고 수도자들은 독신생활을 했다. 3번째 종파는 상급제사장·대지주·귀족들이 속한 사두가이파이다. 이들은 헬레니즘을 숭상하고 하스모네 왕가 및 로마 식민정권과 결탁했다(헬레니즘 종교).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됨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이들은 예언서들의 영감을 거부하고 구전된 율법을 배척했으며 오직 모세5경만을 성서로 받들었다. 또한 이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부활을 부정하고(사도 23:6~8) 영혼불멸과 섭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식한 시골 사람들은 위에 소개한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고 십일조법·정결법·기도법 등을 소홀히 했다. 지식인들은 이들을 '땅의 백성'(암 하레츠)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이 시대에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50만~70만 명쯤 되고, 해외에 이민가서 살던 유대인들은 200만~5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해외 유대인들은 시리아·소아시아·메소포타미아·이집트에서 많이 살았다. 서기 원년 무렵에 지중해 주민 중 10%가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BC 5~4세기의 유대인 수에 비해서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수가 급격히 불어난 까닭은 이방인들을 많이 입교시켰기 때문이다. 그 예로 BC 130년 요한네스 히르카누스와 BC 103년 아리스토불로스가 팔레스타인 남부지역 이두매아 사람들과 북부지역 이두레아 사람들을 강제로 대거 입교시켰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이 BC 3~1세기에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BC 1세기에 씌어진 〈아리스테아 서한 Letter of Aristeas〉에 따르면 역자 72명이 〈구약성서〉를 각자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했는데, 역문들을 비교해보니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라 이 역문을 70인역이라 한다. BC 1세기에 마카베오 2~4서도 이집트에서 씌어졌다.
알렉산드리아 유대 공동체에서 배출된 가장 뛰어난 학자는 필론(BC 20경~AD 50)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과 유대교 신앙 간의 융화를 시도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우의적 방법으로 성서를 풀이했는데, 이 주석 방법은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팔레스타인에서 씌어진 작품으로는 우선 쿰란 문헌을 꼽을 수 있다.
팔레스타인 작품들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성서 전설 또는 성서 주석류로 〈욥 유언집〉·〈이사야 순교기〉·〈아담과 하와의 생애〉, 쿰란에서 발견된 〈창세기 외경〉·〈토비트〉·〈수산나〉·〈벨과 뱀〉 등이 있고, 묵시문학으로는 〈다니엘〉·〈에녹〉·〈모세 승천기〉·〈시리아어 바룩〉·〈에스드라 4서〉·〈아브라함 묵시록〉 등이 있으며, 역사서로는 요세푸스(AD 38경~100 이후)가 쓴 〈유대 전쟁 Bellum Judaicum〉·〈유대 고대사 Antiquitates Judaicae〉가 있다.
그밖에 요세푸스는 〈자서전 The Autobiography of Josephus〉·〈아피온 논박 Contra Apionem〉을 썼다. 지혜문학류로는 시라크의 아들 예수가 BC 180년경에 쓴 〈집회서〉·〈12족장의 유언〉 등을 꼽을 수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그리스 시대의 유대교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