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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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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2년 미국에서는 원자폭탄 제조 계획인 소위 '맨해튼 계획'이 수립되었다. 또한 1943년에는 맨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엔리코 페르미가 이끄는 물리학자 팀이 시카고대학교의 스태그(Stagg) 경기장 콘크리트 관중석의 지하에 세계 최초의 원자로인 '시카고 파일'(Chicago Pile)을 제작했다.

1943년에는 맨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테네시 주 오크리지 서쪽 20마일 지점에 원자폭탄 제조용 우라늄 생산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뉴멕시코 주의 '로스앨러모스 과학연구소'에서는 폭탄 개발 및 설계를 수행했다. 1945년 7월 16일 맨해튼 계획 팀은 뉴멕시코 주 앨러머고도에 첫 원자폭탄 폭파 실험을 성공시켰고, 그해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3일 후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다. 이로써 핵 에너지는 최초로 군사적 목적에 이용되었다.

전후 캐나다·영국·미국은 국제연합(UN)에 원자력의 국제적 통제계획안을 제안했고 UN 총회는 1946년 1월 원자력 통제를 위한 UN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AEC)를 탄생시켰다. 불행히도 이 AEC는 원자탄 제조에 관한 미·소 간의 갈등으로 소기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미국 내에서는 원자력이 군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정치가들의 주장과 민간인들의 손에 넘겨져야 한다는 반론이 대립되고 있었는데, 이 대립은 1946년 원자력법(Atomic Energy Acts)을 통과시킴으로써 타협을 보게 되었다.

이 법은 군사연락위원회(Military Liaison Commission)와 더불어 5명의 민간인으로 구성된 AEC로 하여금 핵에너지 연구개발을 통제하게 만들었고 또한 미국 의회 내에 상하의원 각각 9명씩으로 구성된 공동원자력위원회(Joint Committee on Atomic Energy)를 설치하여 원자력 문제에 관한 의회의 감시역할을 담당하도록 했다.

원자력법에도 불구하고 민간의 핵에너지 개발은 부진했는데,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목적으로 원자력 정보와 자료에 대하여 여러 나라가 상호 협력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을 밝혔고 이 결과 1957년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탄생했다. 이 기구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증진시키고 동시에 철저한 감시 체제를 통하여 이 기구가 제공한 핵물질과 원자력 정보가 군사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는 데 설립목적을 두었다. 이 기구의 헌장은 초기에 62개국이 인준했으나 현재 오스트리아 빈에 사무국을 두고 회원국은 약 110개국으로 늘어났다.

1954년 미국 원자력위원회와 웨스팅하우스전기회사가 펜실베이니아 선적항에 세계 최초의 상업용 규모의 발전소를 세우고 원자력 발전을 시작했다. 이후로 상업용 원자로는 전세계적으로 보급·이용하게 되었다. 원자력위원회는 '동력시험로계획'(power reactor development program) 하에서 전력회사들이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일을 장려했는데, 이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에는 1962년 당시 233기의 원자로를 운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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