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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6. 4. 5, 미국 버지니아 프랭클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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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5. 11. 14, 앨라배마 터스키기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교육자·개혁가.
터스키기 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내면서 학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1895~1915년 미국 흑인들의 가장 영향력있는 대변인이었다.
노예 움막에서 태어났으나 노예해방 뒤 가족들과 함께 웨스트버지니아 몰덴으로 옮겼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9세 때부터 일하기 시작해 처음에는 소금공장에서 나중에는 탄광에서 일했다. 교육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하여 버지니아에 있던 햄프턴 사범농업학교에 등록하고(1872),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잡역부로 일했다.
1875년 졸업한 뒤 몰덴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2년 동안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어른들을 가르쳤다. 1878~79년 워싱턴 D. C.에 있는 웨일랜드 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햄프턴 학교의 교직원이 되었다.
1881년 그는 터스키기에 흑인들을 위해 새로 세운 학교인 터스키기 사범공업학교의 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학교는 2개의 조그만 건물을 개조하여 만든 것으로 아무런 시설도 없었으며 자본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학교의 발전에 평생을 바쳐 기념비적인 업적을 이루어냈다.
34년 뒤 그가 죽을 때쯤 이 학교는 훌륭한 시설을 갖춘 건물 100여 채와 약 1,500명의 학생, 38개 직종에 걸쳐 거의 200명에 이르는 교수진과 약 200만 달러 정도의 기부금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재건시대' 이후 흑인들의 이익을 가장 잘 실현시킬 수 있는 길은 기능 및 산업 기술을 교육하고 인내심·진취성·근검절약 등의 덕성을 기르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대부분 가난하고 무식한 농사꾼이었던 동료 흑인들에게 완전한 시민권과 정치적 힘을 얻으려는 노력을 잠시 포기하고, 대신에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도록 산업 및 농업 기술을 함양하라고 당부했다.
처음에 흑인들은 인종 분리와 차별을 받아들여야겠지만 부와 교양을 얻게 되면 백인 사회로부터 점차 인정을 받고 받아들여져서 두 인종 사이의 분리의 벽은 허물어질 것이며, 결국에는 흑인들도 동등한 시민권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애틀랜타 박람회에서 다양한 인종의 청중들을 향해 그는 획기적인 연설을 했는데(1895. 9. 18), "순수하게 사회적인 모든 일에서 우리는 손가락처럼 서로 분리될 수 있다. 그러나 상호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모든 일에서 우리는 하나의 손이 될 수 있다"라는 유명한 말로 자신의 현실적 접근방식을 요약했다.
흑인 지성인 W. E. B. 두 보이스 같은 비판가들은 이런 견해를 '애틀랜타 타협'이라 부르면서 워싱턴이 직업 기술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학문적 발전과 시민권 획득을 저해시키고 있다고 개탄했다.
사실 워싱턴이 미국의 모든 흑인을 대변해 활동하던 동안 흑인들은 국가적 정치 활동의 실질적 참여와 참정권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되었으며, 남부 주(州)에서는 엄격한 인종 분리와 차별이 제도화되었다. 심지어 1901년 그의 백악관 방문까지도 '흑인으로서 예의에 벗어나는 행위'라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흑인들은 그의 방식을 무난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백인들 사이에 그의 영향력은 아주 막강해서 그는 정부나 백인 박애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을 만한 흑인 또는 흑인단체를 결정하는 데 있어 비공식 조정자 역할을 했다.
나아가 하버드대학교(1896)와 다트머스대학(1901)에서 명예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가 쓴 12권의 저서 가운데 자서전 〈노예신분으로부터의 상승 Up from Slavery〉(1901)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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