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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3. 1. 10, 칠레 산티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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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8. 1. 2, 산티아고 |
국적 | 칠레 |
요약 칠레의 시인.
크레아시오니스모로 알려진 단명했던 아방가르드 운동의 자칭 창시자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고국인 칠레뿐 아니라 파리·마드리드에서도 문학적 선구자들 중 대표인물로 당시 유럽, 특히 프랑스의 혁신적인 시 형식과 심상을 동포들에게 소개했다.
칠레에서 여러 권의 시집을 출판하고, 모든 시적 과거를 거부한 〈봉사하지 않습니다 Non serviam〉(1914) 같은 문학선언서로 인정과 악명을 동시에 얻은 후 1916년 파리로 건너갔다. 거기서 영향력 있는 문학지 〈노르 쉬드 Nord-Sud〉에서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피에르 르베르디와 함께 일했다. 이 기간 동안 영혼창조설이 구상되었는데, 그 창시자가 그인지 르베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우이도브로는 가장 유난스러운 대표자임에는 틀림없었다.
〈북극의 시 Poemas árticos〉(1918)와 프랑스어로 씌어진 〈선택된 계절 Saisons choisies〉(1921)에서 그는 놀라운 심상들을 어울리지 않게 병렬시킨다든가, 낱말, 알파벳 자모들을 비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로 되는 대로 나열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창조설을 예증했다.
1918년 마드리드로 가서, 그곳 아방가르드 문학 협회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1921년 영혼창조설의 스페인 분파인 극단주의 창시자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유럽과 칠레를 자주 오가며 제1차 세계대전 후 칠레에서 유행한 프랑스풍 문학실험의 풍토를 창출한 책임자였다.
그가 이런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자주 잡지기사와 시를 발표한 만큼, 별 진지함 없이 칠레 대통령에 입후보한 것같이 대중에게 잘 알려질 수 있는 일들을 많이 벌였기 때문이다. 〈사티로스, 또는 말의 힘 Sátiro o el poder de las palabras〉(1939)과 같은 소설처럼 영혼창조설론자의 작품으로 저술을 계속하면서, 그는 운동 그 자체가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그러한 문체로 된 작품을 다작한 시인으로 남아 있었다. 우이도브로의 인기는 한동안 퇴색되었지만 그의 작품은 후대 라틴아메리카 시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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