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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6. 12. 6, 일본 야마가타 현[山形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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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7. 12. 24, 도쿄[東京] |
국적 | 일본 |
요약 일본의 국수주의적 정치 이론가.
그의 저서들은 1930년대 일본 정치를 지배했던 극우세력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많은 우파 세력들이 시도한 행동을 직접 조종하거나 그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일본 정부의 대내적 선전활동을 기획했다.
1911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철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유명한 우익 주창자인 기타 잇키[北一輝]와 함께 영향력있는 국가주의 단체인 유존샤[猶存社](1918)를 만들었다. 유존샤는 기관지인 〈오타케비 雄叫び〉라는 잡지를 통하여 일본은 국가주의적 사회주의 정부 체제와 과거 봉건주의 시대의 무사적 가치체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유존샤는 군부세력을 비롯해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오카와는 기타와 사이가 틀어졌고, 그는 1924년에 〈닛폰 日本〉이라는 잡지를 독자적으로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본토에 군사정부를 세울 것과 만주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확대해나갈 것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대로 일본의 만주에 대한 경제 침투가 현실화됨으로써 그는 더욱 명성을 날렸으며, 1929년 정부기관으로 신설된 동아시아 경제조사국의 국장이 됨과 아울러 육군대학과 해군대학의 특별 강사로도 임명되었다.
1931년초 오카와는 일단의 청년 장교들과 함께 군부가 정권을 탈취할 계획을 세웠다. 비록 이 쿠데타는 불발로 끝났지만, 이 일은 우익 단체가 정부에 대항한 최초의 직접적인 시도였다. 같은 해 10월 2번째 쿠데타가 있었으나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1932년에 체포되었으며 이누카이 쓰요시[大養毅] 총리 암살사건(5월 15일)에 연루된 혐의로 9년형을 선고받았다. 1937년에 가석방되어 2년 뒤에 동아시아 경제조사국에 다시 들어갔으며 이때 일본 국민들에게 국수주의 감정을 고취시키려고 도쿄의 호세이대학[法政大學]이 마련한 특별 프로그램의 우두머리로 일했다.
방송 프로그램과 짧은 방송연설이 유명해지면서 '동양의 논객'으로 알려졌다. 1945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었지만, 정신이상자라는 이유로 기소가 중지되었다. 2년 동안의 감금 생활을 끝낸 뒤 여생을 저술에 몰두했고, 〈코란〉을 일본어로 완역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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