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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1. 8. 4,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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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미국 최초로 당선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이다. 케냐 인 아버지와 미국 태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877년 남북전쟁 이후 상원 의원으로 선출된 세 번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공화당 후보인 애리조나 주 연방상원의원 존 매케인을 물리치고 2008년 11월 4일 미국의 44대 대통령각주1) 으로 당선되었다. 200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2012년 11월 6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밋 롬니 후보를 물리치고 연임에 성공했다.
정식 이름은 버락 후세인 오바마 2세(Barack Hussein Obama, Jr.). 공화당 후보인 애리조나 주 연방상원의원 존 매케인을 물리치고 2008년 11월 4일 미국의 44대 대통령각주2) 으로 당선되어 미국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이 되었다. 2012년 11월 6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밋 롬니 후보를 물리치고 연임에 성공했다. 대통령에 출마하기 전 오바마는 미국 일리노이 주 민주당 연방 상원 의원이었다. 그는 1877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재건시대(Reconstruction : 남북전쟁 전후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연합 11개주의 연방 재편입에 따르는 정치·사회·경제 문제의 해결을 모색했던 시기) 이후 상원 의원으로 선출된 세 번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초기 생애
오바마의 아버지인 버락 오바마 1세(Barack Obama, Sr.)는 십대 시절 케냐 시골의 양치기였다. 그는 미국에서 유학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후에 케냐 정부의 고위 경제관료가 되었다. 오바마의 어머니인 앤 던엄(S. Ann Dunham)은 캔자스 주, 텍사스 주, 워싱턴 주에서 두루 살다가 호놀룰루 주에 정착했다. 1961년에 그녀는 하와이 대학교의 러시아어 수업에서 오바마의 아버지를 만나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결혼을 했다. 오바마가 두 살이었을 때, 오바마의 아버지는 공부를 하기 하버드 대학교로 떠났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64년에 오바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을 했다. 오바마가 열 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를 한 번 잠깐 만났다. 후에 오바마의 어머니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유학생 롤로 소에테로와 재혼했다. 그리고 둘째 마야를 낳았다. 오바마는 어머니, 새 아버지, 이복 여동생과 함께 자카르타에서 몇 년 동안 살았다. 그 곳에서 오바마는 공립학교를 다니면서 이슬람 교리를 배웠고, 가톨릭 사립 학교를 다니면서 기독교 교리도 배웠다.
그는 1971년에 하와이로 돌아와 작은 아파트에서 때로는 조부모님들과, 때로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한동안 인도네시아에 거주했다가 하와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1980년 소에테로와 이혼하기 전에 박사 학위 공부를 위해 다시 외국으로 나갔다. 1979년에 오바마는 호놀룰루 소재의 상류 대학 입시 준비 학교인 푸나호우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로스앤젤레스 교외에 있는 옥시덴탈 대학교에서 2년 동안 공부했다.
그 후 그는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로 편입했으며 그 곳에서 1983년에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교수들의 독려로 그는 대학 재학중 뿐만 아니라 졸업 후에도 계속 지적인 성장을 이루어 나갔다. 그는 다소 금욕적인 생활을 했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 프리드리히 니체, 토니 모리슨 등의 문학과 철학 작품을 읽었다. 그는 2년 동안 맨해튼 소재의 학술 연구·출판 및 자문 회사인 비즈니스 인터내셔널사에서 필자와 편집자로 일한 후, 1985년 시카고의 빈민 지역인 파사우스사이드에서 사회 활동가로 일을 했다.
지역 사회 활동
그는 3년 후에 학교로 돌아가서 사상 처음으로 하버드 대학교 법과 대학 학술지 편집장을 지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되었으며, 1991년에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을 우등(magna cum laude)으로 졸업했다. 1989년 시카고 사이들리 오스틴 법률 회사에서 서머 인턴 사원으로 있는 동안에 오바마는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시카고 출신의 젊은 변호사 미셸 로빈슨을 만났다. 두 사람은 1992년에 결혼했다.
오바마는 법학 학위를 받은 후에 시카고로 이주했으며 민주당에서 활동하면서 빌 클린턴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는 또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투표권 행사를 하도록 독려하는 프로그램을 담당했는데, 이를 통해 일리노이 주 연방 상원 의원인 캐롤 모슬리 브라운의 탄생을 지원했다. 그녀는 사상 처음으로 연방 상원 의원에 선출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었다. 이 무렵 그는 첫번째 책인 회고록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Dreams From My Father)〉(1995)을 집필했다. 이후 오바마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헌법 과목을 가르쳤고 시민권 문제를 다루는 인권 변호사로 일했다. 1996년에 그는 일리노이 주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선거 자금 규칙 강화, 서민들을 위한 의료 혜택 확대, 형법, 사법, 복지법 개혁에 대한 법률 제정 통과에 기여한 것이다 .
정계 진출
2004년 그는 2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후보들이 처음으로 겨루었던 연방 상원 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의 앨렌 케이즈를 물리치고 연방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연방 상원 의원 선거 유세를 하는 동안 오바마는 2004년 6월 민주당 전당 대회 기조 연설을 통해 국제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그는 연설에서 자신의 일생을 서술하면서 모든 미국인들은 정치·문화·지역을 초월하여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그 연설은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바마의 회고록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게 했으며, 이듬해 연방 상원 의원 취임 후 오바마는 민주당의 주요 인물로 급부상했다.
2006년 8월 그의 아버지의 고향인 케냐를 방문하는 여정은 국제적인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바마의 인기는 계속 올라갔다. 몇 주 후 그는 두 번째 책인 〈담대한 희망 The Audacity of Hope〉(2006)을 출간했는데, 출간되자마자 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07년 2월 그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주지사로 집무를 했던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의 올드 스테이트 캐피톨(Old State Capitol)에서 2008년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민주당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대통령 출마
오바마의 개인적인 카리스마, 감동적인 연설, 그리고 정치 시스템 확립에 대한 변화를 가져오겠다는 그의 선거 공약은 많은 민주당원들, 특히 젊은 유권자와 소수 민족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2008년 1월 3일 오바마는 첫 번째 주요한 후보 지명 경선인 아이오와 주 당원 대회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대결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승리했다. 그러나 5일 후에 열린 뉴햄프셔 예비 선거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에게 패배했다. 이후 치열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예비 선거가 뒤따랐다. 슈퍼 화요일인 2월 5일 오바마는 그의 고향인 일리노이 주와 전통적인 정치의 선도를 이끄는 미주리 주를 포함하여 12개 이상의 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클린턴이 대선거구인 캘리포니아 주와 뉴욕 주를 포함한 여러 주에서 승리함으로써 선두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달 하순경 오바마는 슈퍼 화요일에 이어 11개의 예비 선거와 당원 대회에서 연이어 손쉽게 승리하여 대의원 수에서 선두로 나섰다. 그러나, 3월초 힐러리 클린턴이 오하이오 주와 텍사스 주에서 대승을 하자 그 여세는 약화되었다. 여전히 대의원 수에서 그의 우세는 유지되고 있었지만 오바마는 4월 22일 펜실베이니아 주 예비 선거에서 패배했다. 2주 후 그는 인디애나 주에서 간발의 차이로 패했으나 노스캐롤라이나 주 예비 선거에서 큰 차이로 승리함으로써 힐러리 클린턴과 간격을 넓혔다. 힐러리 클린턴은 초기에 소위 슈퍼 대의원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오바마가 많은 주에서 승리하면서 대의원 수를 확보해가자 많은 슈퍼 대의원도 힐러리 클린턴을 떠나 오바마 지지로 옮겼다. 6월 3일 몬태나 주와 사우스다코타 주에서 열렸던 마지막 예비 선거에서 오바마를 지지하는 대의원의 수는 민주당 후보 지명을 결정하는 데 필요한 전체 수를 넘어섰다.
8월 27일 오바마는 사상 처음으로 주요 정당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미국의 가장 높은 사무실로 진출하기 위해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에게 도전하게 되었다. 매케인은 이제 겨우 초선 연방 상원 의원인 오바마는 국정 경험이 일천하다고 비판했다. 그 비판에 맞서 오바마는 오랫동안 외교 정책 전문가로 활동해 온 노련한 델라웨어 주 상원 의원 조 바이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오바마와 매케인은 치열하고 비싼 경쟁을 했다. 두 후보들은 유권자들에게 뚜렷한 이념적 선택을 제안했다. 지속적인 대중적 지지로 힘을 얻은 오바마는 그의 선거 운동에 필요한 연방 재정 지원을 사양하고 기록적인 숫자의 소액 기부와 인터넷 기부자로부터 수억 달러를 모금했다. 오바마는 선거 기금 덕에 수많은 텔레비전 광고를 제작하고 중요한 경합 지역과 이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을 지지했던 주들에 뿌리 깊은 풀뿌리 단체들을 조직할 수 있었다.
미국 역사상 첫번째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 당선
오바마는 이라크에 파병한 대부분의 전투 군대들을 신속히 철회할 것과 서민과 중산층 유권자들의 부담을 경감할 수 있도록 세금 정책의 재정비를 요구했다. 반면에, 매케인은 미국은 이라크에서 완벽한 승리를 할 때까지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며 오바마의 웅변술에 대해 웅변은 감동적이지만 알맹이는 없다고 비난했다. 2008년 11월 4일 대의원 선거에서 결국 유권자의 52%의 지지를 얻어 오바마가 승리했다. 그는 젊은 유권자와 여성, 흑인 등 사회적 소수 계층의 확고한 지지를 바탕으로, 2004년 선거에서 존 케리가 승리했던 주들뿐만 아니라 지난 2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했던 콜로라도 주, 플로리다 주, 네바다 주, 오하이오 주, 버지니아 주에서도 승리했다. 그는 2009년 1월 20일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주요 정책
오바마는 적극적인 사회복지 정책을 추진했다.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는 그의 주된 관심사로, 민영 의료보험제도로 인해 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는 많은 사회적 약자에게 의료 혜택이 가능하도록 개혁했다. 보수층에서는 별로 환영하지 않던 지구 온난화 문제 등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대응을 시사했고, 동성결혼의 합법화와 총기 규제의 강화 등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연임 성공
오바마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2012년 공화당의 밋 롬니 후보를 332대 206으로 누르고 연임에 성공했다. 연임 이후 미국의 경제가 많은 난관을 거친 후 안정을 찾기 시작하면서 지지율이 높아졌다. 그는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중산층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정책을 펼치면서 정책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2015년에는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을 체결하면서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키웠으며, 범대서양 무역 투자 동반자 협정을 추진했다. 2015년 7월에는 이란 핵 협상을 타결하면서 중동 문제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평가
의료보험 개혁, 동성결혼 합법화, 고소득자 증세 등 비교적 진보적 정책을 펼쳐 공화당과 보수층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중동 문제에서도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쿠바와의 수교, 파리 기후 협약 가입 등 전지구적인 문제에서도 업적을 보이면서 임기말까지 높은 지지를 받았다. 소박하면서도 활발한 미셸 오바마의 내조가 그의 인기를 높이는 데에도 한 몫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스포츠를 좋아하며, 높은 유머 감각으로 대중적 인기도 높았다. 그의 회고록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Dreams From My Father〉(1995)은 고인이 된 그의 아버지와 케냐에 있는 가족들의 삶을 기록함으로써 다인종인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였으며, 두 번째 책인 〈담대한 희망 The Audacity of Hope〉(2006)은 미국을 위한 미래상에 대한 논쟁을 담은 책이었다. 그는 2009년 핵무기 확산에 대한 강력한 제재 정책을 발표한 것이 높이 평가되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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