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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74. 8. 2, 프랑스 생클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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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23. 12. 2, 베르사유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귀족.
duc de Chartres라고도 함(~1701).
어린 왕 루이 15세의 섭정(1715~23)으로 활약했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샤르트르 공작으로 알려졌다.
대동맹전쟁(1689~97) 때 영국과 네덜란드에 맞서 프랑스군에서 복무했으며 스스로 고위 지휘관 자격이 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큰아버지인 루이 14세는 그를 임명하지 않았다. 샤르트르 공작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왕이 아끼고 적출로 인정한 딸인 자신의 아내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을 일부러 무시했다. 불손한 작태와 습관적인 음주, 방탕한 행동으로 인해 1701년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할 무렵에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4)중 이탈리아(1706)와 스페인(1707~08)에서 군사지휘권을 맡게 되었다.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으뜸 서열의 왕손이었기 때문에 루이 14세가 죽자(1715. 9. 1) 5세밖에 안 된 루이 15세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유언을 통해 오를레앙이 왕실의 절대주의적인 전제정치체제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적출로 인정한 2명의 사생아 아들에게 실권을 넘겨주는 규정을 마련했다. 만약 허약한 루이 15세가 죽었다면 적자로 인정된 두 왕자들은 루이 14세의 손자인 스페인 왕 펠리페 5세의 계승권을 옹호하면서 오를레앙의 왕위계승권을 부인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를레앙은 섭정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왕이 되려는 야심을 위해 파리 고등법원을 부추겨 루이 14세의 유언장을 무효로 만들게 했다(1715. 9. 12). 또 다원회의제도(La polysynodie)라는 시험적인 제도를 수립하여 각료들의 권한을 없애고 고급 귀족들의 정치적 권력을 회복시키고자 했다. 이 새 제도가 너무나 성가시고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드러나자 1718년 9월 이를 해체하고 각료직을 부활시켰다.
오를레앙의 외교정책 역시 그의 야심과 결부되어 있었다. 1716년 각료인 사제(후에 추기경이 됨) 기욤 뒤부아로 하여금 프랑스의 숙적인 영국과 동맹을 맺어 펠리페 5세의 프랑스 왕위계승 요구에 영국이 확고히 반대하도록 조처했다. 1719년 프랑스·영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개시했고 이듬해 펠리페 5세는 할 수 없이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오를레앙을 루이 15세의 계승자로 인정했다. 한편 오를레앙은 루이 14세 치하에서 누적된 엄청난 전쟁 비용이 몰고온 심각한 재정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1717년 스코틀랜드의 은행가인 존 로에게 재정개혁을 맡겼으나 로의 개혁은 3년 뒤에 재정 파탄을 가져왔으며, 이로 인해 오를레앙의 통치는 크게 신망을 잃었다.
오를레앙의 섭정은 1723년 2월 루이 15세가 성인이 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듬해 8월 그 자신은 총리가 되었으나 그후 4개월 만에 죽었다. 필리프 에를랑제가 쓴 오를레앙의 전기 〈섭정 Le Régent〉이 1938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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