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개요
이 시기는 무성 영화예술의 최성기였다.
일반인은 발명 당초부터 토키와 컬러 영화를 바랐지만, 과학적으로는 아직 불가능했다. 영화작가는 흑백과 무성을 궁극의 유일한 영화라고 믿고 영상의 예술성만을 탐구했다. 그결과 프랑스에서의 포토제닉설과 리듬설, 소련에서의 몽타주 이론이 주창되어 그것들은 작품상으로 실행도 되었지만, 그 극단의 경우는 영화를 난해하게 하는 경향도 있었다. 포토제닉설은, 영화에 의해 처음으로 나타나는 현실의 신비성을 존중했고, 리듬설은 영화 작품의 생사는 그 쇼트 내의 움직임의 리듬과 쇼트의 연속에 의해 생기는 리듬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으며 몽타주 이론은 상호 독립성이 없는 관계의 쇼트의 연속 또는 충돌에 의해 현실과는 별도로 새로운 영화적 현실이 생겨나는 것이야말로 영화 표현의 본질이라고 했다.
비(非)상업주의, 이야기 부정의 전위영화가 발생한 것도 이 시기의 중반 무렵이다. 그러나 그들 이론 및 작품도 예술과는 무관계한 토키의 출현으로 일단의 백지화 또는 많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어, 이에 무성영화는 종말을 고했다.
프랑스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영화는 눈부신 부활을 나타냈는데, 그 추진력은 영화비평과 작품활동의 일치된 노력 덕분이었다.
많은 경우 영화작가 자신이 비평가나 이론가를 겸하고 있었다. 먼저 그들이 주장한 것은 '미국 영화에서 배워라'였다. 그리피스·인스·세넷·채플린이 그들의 스승이 되었다. 루이 델뤼크는 미국 영화와 스웨덴 영화로부터 포토제닉설의 암시를 받았고 장 엡스탕은 델뤼크의 뒤를 이어 포토제닉설을 철학의 경지에까지 올려 놓았으며 레옹 무시나크는 리듬설을 주장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위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그 선구자 아벨 강스는 이미 1915년에 카메라에 의한 화면의 왜곡을 이용하여 〈튀브 박사의 실수 La Folie du Docteur Tube〉를 그렸다. 강스는 다시 〈전쟁과 평화〉(1918)·〈철로의 백장미〉(1923)·〈나폴레옹 Napoléon Vu par Abel Gance〉(1927) 등을 만들어 프랑스 영화의 선두에 섰다. 〈철로의 백장미〉는 무성영화의 걸작 중의 걸작으로, 그 화면 수를 계산해서 나타낸 리듬은 영화 리듬의 고전적인 모델이 되었다.
또 강스는 〈나폴레옹〉에서 사용한 3면 스크린으로 현재의 시네라마의 원형을 발표했다. 게다가 중앙의 화면과 양쪽 화면에 대립되는 내용을 담는 동시적 종합표현의 새로운 시도까지 했다.
마르셀 렐비에는 포토제닉과 리듬을 겸비한 〈엘 도라도 El Dorado〉(1921)를 대표작으로 한다. 장 엡스탕은 움직임을 포토제닉의 핵심으로 하는 이론가인데, 그 주장은 그의 작품 〈진심〉(1923)에서 실현되었다.
포토제닉설이고 리듬설이고 간에, 그 근본은 영화를 문학과 연극으로부터 해방시켜서 자주 독립의 영상예술로 만드는 데 있었다. 이 생각을 극단으로 몰아가면, 이야기와 드라마의 부정이 되고, 영화는 오로지 영상만의 표현이 된다. 여기에서부터 전위영화 운동이 탄생되었다(1924)(전위예술). 페르낭 레제의 〈발레 메카니크 Le Ballet mécanique〉(1924), 르네 클레르의 〈막간(幕間) Entr'acte〉(1924) 등이 그 최초의 작품이었다.
영화의 몽환적 성질은 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에서 꿈을 중시한 것과도 공통점을 가지는 것으로, 그들은 순수 영화에도 흥미를 가졌으며,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작품은, 앙트낭 알토가 시나리오를 쓰고, 제르멘 뒬라크가 영화화한 〈조개와 성직자 The Seashell and the Clergyman〉(1927)였다. 순수영화는 반(反)상업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서 일반 영화관에서는 상영되지 않았으나, 그 실험적 연구는 상업영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예로 전위수법을 대담하게 수용한 무성영화 최후의 걸작 〈잔 다르크의 재판 The Trial of Joan of Arc〉(1928, 카를 드라이어)이 있다. 또 전위영화인으로서 일반 극영화 감독이 된 인물도 적지 않지만, 그중에서는 르네 클레르가 으뜸이다. 그의 〈이탈리아의 밀짚모자〉(1927)는 보드빌 희극의 걸작이었다. 대체로 이 시기의 작가·작품은 리얼리즘과는 관계가 없지만, 심리적 리얼리스트라고도 할 만한 작가도 있었다. 〈모습〉(1923)·〈눈사태〉(1924)·〈테레즈 라캥 Thérèse Raquin〉(1928)의 자크 페데르이다.
스웨덴
1916~23년은 스웨덴 영화 초기의 황금 시대였다.
이에 앞서 빅토르 시외스트룀은 〈파도 높은 날〉(1916)·〈산 사랑 죽은 사랑〉으로 독자적인 예술의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는데, 〈영혼의 불멸〉(1920)에 의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편, M. 스틸러는 〈눈보라의 밤〉(1919)·〈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Gösta Berlings saga〉(1924) 등의 문제작을 만들었다. 스웨덴 영화의 명성은 이 2명의 감독에 의해 이룩되었는데, 그 특질은 북유럽적인 종교적 신비주의의 시각화를 자연묘사에 의해 한 것이었다.
자연도 영화의 등장인물이었다. 그 조형미는 인간의 심리까지 표현했다. 이 스웨덴적 수법은 독특한 것이었기 때문에 타국의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포토제닉 표현에 특히 그것이 분명했다. 1923년 이후, 시외스트렘과 스틸러가 미국으로 건너감으로써 스웨덴 영화는 침체되었다.
독일
영화제작이 비교적 뒤떨어져, 1911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영화는 급격한 발전을 맞이했다. 첫째로는 인플레이션이 수출을 조장한 덕도 입었지만, 표현주의 영화의 발흥이 독일 영화의 명성을 세계로 넓힌 일이 그 최대의 원인이었다. 표현주의(Expressionismus)는 괴기성(怪奇性)과 이상성(異常性)을 주제로 하는 것이 많았고, 이것은 본디 독일 예술의 하나의 특질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이지만, 전후의 사회불안이 이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표현주의 영화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Das kabinett des Dr. Caligari〉(1919)이다.
정신병원 원장이 사실은 미치광이였다는 이야기로, 전부가 세트 촬영인데다 거리·숲·집·소도구 및 배우까지도 모두 별스럽게 왜곡되고 변형되어 있는 점에 이 작품의 특징이 있다. 이것은 전세계 영화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이상성은 차치하고라도, 인물 또한 장치와 동렬(同列)이라는 사고방식은 스타 중심의 영화에 대한 본질적인 수정을 의미한 점에서 중요하다.
순수한 표현주의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몇 편밖에 제작되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 게오르크 카이저 희곡을 영화화한 〈아침부터 밤중까지〉(1920, 카를 하인츠 마르틴)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상으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그후 표현주의 영화는 사라졌으나 표현주의적 경향을 가진 작품은 독일 영화의 주류를 차지했고, 이에 독일 영화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프리츠 랑의 니벨룽겐 전설을 영화화한 〈지크프리트 Siegfried〉(1922~24)와 공상과학 영화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1926)는 대(大)세트의 괴이성으로 평판이 났고, F.W.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 Der letzte Mann〉(1924)은 인간 내부의 이상한 밑바닥을 탐색하는 영화였다.
또 무르나우 영화는 카를 그루네의 〈고혹(蠱或)의 거리〉(1923), 루푸 피크의 〈제야(除夜)의 비극〉(1924)과 함께 자막이 없는 영화로 유명하다.
무성영화는 극의 상황을 영상으로 전달할 수 없을 경우 자막으로 설명했는데, 자막은 영상에 있어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제거했다. 그 일을 투철하게 관철시켜 무자막으로 만든 것이 위에 쓴 작품이다. 이것도 무성영화의 예술성을 극단적으로 생각한 결과이다.
그러나 무자막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드라마의 범위는 당연히 좁아지므로 세 작품 모두 일정한 시간과 환경 내의 소수 인물의 생활 드라마였다. 그러므로 소수의 작품이 만들어지고는 끝나버렸다. 그밖에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발터 루트만의 전위영화 다큐멘터리 〈베를린:대도시 교향악〉(1927)과 진보적인 감독 G.W. 파브스트의 〈활기 없는 거리 Die freundlose Gasse〉(1925)가 있다.
소련
제1차 세계대전 전에도 러시아 영화는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문예영화 중심이었다.
그러나 10월혁명 이후 모든 것은 무(無)에서 출발했다. 먼저 지가 베르토프는, 영화는 연출을 가하지 않고 사실만을 촬영해야 한다면서 뉴스 영화의 일종인 〈키노-프라우다〉를 연속적으로 제작했다. 이윽고 그는 서로 독립적인 실사(實寫)의 단편을 편집해 1편의 작품으로 만드는 일도 실행했다. 그의 주장과 작품은 전세계의 영화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전후 프랑스에 있어서의 '시네마-베리테'가 그 최근의 예이다.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도 '몽타주 영화'이지만, 정확한 의미에서의 몽타주 이론은 레프 쿨레쇼프, 에이젠슈테인, 푸도프킨에 의해 제창되었고 실현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몽타주 이론은 베르토프와 같이 카메라에 의한 진실추구와 그 표현보다도 현실을 초월한 영화적 현실을 창조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쿨레쇼프는 주로 영화작법으로서 몽타주 이론을 주장했고 에이젠슈테인은 쇼트 사이의 충돌로부터 관념이 탄생하기를 기대했으며, 푸도프킨은 관객의 심리파악에 이것을 유효하게 사용했다. 에이젠슈테인은 〈파업 Strike〉(1924)·〈전함 포툠킨 Battleship Potemkin〉(1925)·〈10월 October〉(1927)·〈낡은 것과 새 것 Old and New〉(1928)으로 이것을 실행했다.
특히 〈전함 포툠킨〉이 세계 영화계에 던진 충격은 컸다. 푸도프킨은 〈어머니 Mother〉(1926)·〈상트페테르부르크의 종말 The End of St. Petersburg〉(1927)·〈아시아의 돌풍 Storm over Asia〉(1928)을 제작했다. 〈어머니〉는 혁명가와 그 어머니를 그린 그의 심리적 몽타주의 걸작이었다.
이와 같이 몽타주 이론의 실현은 화려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것은 혁명의 완성을 비원으로 하는 그들의 열정과 그 사회적 정세가 합체되었기 때문에 그 예술성이 충분히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서 해가 지남에 따라 몽타주 이론은 형식적인 것으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젠슈테인의 〈낡은 것과 새 것〉에는 이미 매너리즘이 나타나고 있었다. 에이젠슈테인과 푸도프킨에 이어 이 시대의 소련 영화를 대표하는 우크라이나의 감독 도프젠코는 〈즈베니고라 Zvenigora〉(1928)로 두각을 나타냈고, 그의 원천인 대지와 자연을 다큐멘터리풍으로 그린 〈대지〉(1930)에서 유례없는 서정성을 펼쳤다. 또 이 시기에 다큐멘터리 작품의 걸작 〈투르크시브 Turksib〉(1929)가 투린에 의해 만들어진 사실도 특기할 일이다.
이것은 중앙 아시아의 철도건설 기록이다. 또 지가 베르토프도 같은 해에 카메라맨이 화면에 자유롭게 등장하는 새로운 다큐멘터리 〈카메라를 든 사나이 The Man with a Movie Camera〉(1929)를 만들었다. 요컨대 1920년대의 소련 영화는 혁명의 새 사회에 부응한 새로운 영화의 예술성을 밝혔다는 점에서 영화사상 획기적 의의를 갖고 있다.
미국
이 시대의 미국 영화는 소련을 제외한 세계 영화시장을 완전히 독점했다.
미국 영화는 다시 몇 개의 대회사가 지배했으며, 할리우드는 영화의 메카가 되었다. 그러나 예술면에서는 유럽에 비해(특히 후반에) 오히려 수준이 떨어졌다. 그때문에 독일로부터 에른스트 루비치와 무르나우, 스웨덴으로부터 시외스트룀과 스틸러, 프랑스로부터 자크 페데르 등이 영입되었다. 미국의 영화감독으로서 새로이 명성을 누린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이나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도 오스트리아에서 왔다.
순수한 미국인 감독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다큐멘터리에 예술적 표현을 발휘한 플라어티의 〈북극의 나누크〉(1922)를 비롯하여 진군(進軍)의 리듬을 적확하게 파악한 킹 비더의 〈대행진 The Big Parade〉(1925), 서부극의 고전적 원형을 보여준 제임스 크루스의 〈포장마차 The Covered Wagon〉(1923), 스웨덴의 출신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정감을 섬세하게 그려낸 클라렌스 브라운의 〈육체와 악마 Flesh and the Devil〉(1927)가 꼽히는데, 슈트로하임의 강렬한 작풍에는 미치지 못한다.
슈트로하임은 〈알프스의 재넘이〉(1918)로 데뷔했는데, 그 잔혹한 리얼리즘은 〈어리석은 아내 Foolish Wives〉(1922)와 〈그리드 Greed〉(1924)에서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미국 영화 중에서 리얼리즘을 이토록 철저하게 다룬 영화는 없었다. 특히 〈탐욕〉은 그 극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애욕이나 물욕에 대해서 뿐 아니라 사회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린 점에서도 압권이었다. 또 슈트로하임은 일반적인 촬영법과는 달리, 각 장면의 진행 그대로의 순서로 촬영하는 방법을 강행했다고도 하는데, 이것도 그 응시적인 리얼리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작에 엄청난 비용을 들인 탓으로 할리우드에서 추방되었다.
채플린의 희극은 이 시기의 〈황금광 시대 The Gold Rush〉(1925)를 대표작으로 꼽는데, 그는 풍자와 빈정거림에 찬 〈파리의 여성 A Woman of Paris〉(1923)의 작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의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비판적 조류에 발맞추어, 상업영화감독인 세실 B. 데밀의 〈남성과 여성 Male and Female〉(1919)에서도 이미 엿보였지만, 예술적이고도 재기 넘치는 영화는 〈파리의 여성〉 이후이다.
이를 다시 남녀간의 원숙한 희극으로 만든 것이 전 독일의 명감독 루비치의 〈결혼 모임 The Mariage Circle〉(1924)인데, 똑같이 독일에서부터 할리우드로 옮겨온 무르나우의 〈일출 Sunrise〉(1927)의 부진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또한 스웨덴에서부터 옮겨 온 시외스트룀은 〈바람 The Wind〉(1928), 스틸러는 〈제국 호텔 Hotel Imperial〉(1927)이라는 수작을 만들었는데, 둘 다 미국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루비치처럼 미국 영화에 융합되지도 않았다.
미국 영화의 신인으로서는 채플린이 발견한 슈테른베르크가 특이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들었다.
처녀작 〈구원을 청하는 사람들〉(1925)은 아마추어적인 좋은 점을 보였는데, 다음 작품 〈암흑가 Underworld〉(1927)는 첨예한 작품으로, 갱 영화라는 장르를 창시했을 정도의 성공작이었다. 그의 〈여자의 일생〉(1929)은 미국 무성영화 최후의 걸작이었는데, 그 생략수법의 날카로움이 일반 관객에게는 난해하다고 평가되었다. 무성영화의 말기는 영화의 예술적 순수성을 철저하게 탐구한 점이 특징이지만, 무성 흑백이라는 제약이 있기 때문에 현실성을 떠나 추상으로 흐르기가 쉬웠으며, 그때 토키가 등장한 것은 극히 암시적이었다.
그것은 영화가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영화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무성 영화예술의 완성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