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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5. 7. 2, 미국 미시시피 디케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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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3. 6. 12, 미시시피 필라델피아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흑인 시민권운동가.
에버스의 살해사건에 전국적인 이목이 집중되었고, 그는 흑인 시민권을 위한 순교자로 추대되었다. 미시시피 디케이터에서 성장했으며, 뉴턴 근처의 고등학교에 다녔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미국 육군으로 유럽에서 복무했다. 1950년 형 찰스 에버스(1923 태어남)와 함께 '앨콘농업 기계대학'을 졸업한 후에 미시시피 주 필라델피아로 가서 그는 보험영업사원으로 일했고, 형 찰스는 레스토랑이나 주유소 등 여러 가게를 경영했다.
동시에 그들은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NAACP)의 미시시피 지부를 조직, 신중한 활동을 통해 지지기반을 확대해나갔다. 1954년 그는 잭슨 편으로 돌아섰고, 미시시피 NAACP 초대 지부장이 되었다. 이후 미시시피 주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NAACP 회원을 모집하고 투표자 등록운동과 불매운동을 벌였다.
1960년대초 흑인 시민권운동이 급속히 확대되는 동안 미국 남부에는 날카로운 긴장상태가 계속되었는데, 특히 미시시피의 상황은 번번이 한계점에 이르렀다. 1963년 6월 1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흑인 시민권에 관한 특별 전국방송을 한 몇 시간 뒤 에버스는 총탄에 맞아 그의 집 앞에 있는 덤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살해사건은 근면하고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미시시피 밖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던 에버스를 전국적인 유명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져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63년 그에게는 NAACP의 스핀가른 메달이 수여되었다. 형 찰스 에버스는 생전에 동생이 맡았던 미시시피 NAACP 지부장으로 임명되어 미시시피 주의 중요한 정치적 인물로 부상했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인 바이런 드 라 벡위스가 에버스 살해사건의 혐의자로 기소되었으나 2차례에 걸친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판결을 내릴 수 없었고, 결국 벡위스는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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