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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24. 9. 7, 스위스 바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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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83. 12. 31, 바젤 |
국적 | 스위스 |
요약
스위스의 의사·종교논쟁가.
본명은 Thomas Lber(Lieber/Liebler).
그가 가르친 적이 없는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관한 교리인 에라스투스주의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9년 동안 철학과 의학을 공부한 뒤 1557년 팔츠의 선제후 오토 하인리히에 의해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 신설된 의학부의 치료학교수로 초빙되었다. 이 대학교에서 곧 의사와 교사로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스위스의 신학자 울리히 츠빙글리가 주창한 종교개혁을 지지한 그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재위기간(1559~76) 동안 팔츠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보급하는 일에 깊이 관여했다. '주의 만찬'에서 유래한 성례전인 성찬식에 관한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성찬식 빵에 임재한다고 본 루터와는 달리, 오직 상징적으로만 임재한다고 본 츠빙글리의 견해를 옹호했다.
그는 칼뱅주의자들이 제네바와 다른 지역들에서 장 칼뱅이 세운 적이 있는 교회 징계 제도를 팔츠에 적용하려는 시도에 반대한 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1568년 영국의 청교도인 조지 위더스가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장로교 교회정치 제도(선출된 대표들의 회의)와 출교 제도를 모두 옹호하는 몇 가지 명제를 보내자, 100개의 명제(훗날 75개로 줄어듦)를 작성하여 반박했다.
에라스투스는 출교란 성서에 어긋나며, 진실로 성례전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례전을 거절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죄에 대한 처벌은 세속 관리들의 권한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뱅주의자들이 선제후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1570년 선제후 포고령에 의해 장로교제도가 확립되었다(→ 교회와 국가).
에라스투스는 새로운 질서에 반대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벗어나 유니테리언주의 경향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2년 동안 출교를 당했다. 그리고 선제후 루트비히 6세(1576~83 재위) 때 루터교가 다시 들어서자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추방당한 뒤 바젤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1580년 의학교수, 1582년 윤리학교수로 임명되었다. '에라스투스주의자'라는 용어는 1643년 영국에서 맨 처음 사용했는데, 장로교도들은 이 용어를 국가수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나쁜 뜻으로 사용했다.
에라스투스의 논문들은 그가 죽은 뒤인 1589년 〈최대 난제에 대한 설명 Explicatio gravissimae quaestioni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의 중요성은 이 책이 여러 차례 번역된 데서 잘 드러난다. 번역본들로는 〈교회 처벌권의 무효성 The Nullity of Church Censures〉(1659)·〈출교에 관한 논문 A Treatise of Excommunication〉(1682) 및 1844년 스코틀랜드판 번역본 등이 있다. 또한 여러 의학 및 과학 논문들을 써서 점성술 신앙과 금속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연금술 등의 대중 미신들을 비판했다.
그는 한때 마녀들과 마법사들의 사형을 옹호한 〈다시 마녀들을 비판함 Repetitio disputationis de lamiis seu strigibus〉(1578)을 써서 마녀신앙에 반대했으나, 당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의 생애와 활동을 다룬 전기로는 R. 베젤로트의 〈토마스 에라스투스 Thomas Erastus〉(195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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