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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소비에스키

다른 표기 언어 Jan III Sobie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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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29. 8. 17, 폴란드 올레스코
사망 1696. 6. 17, 빌라누프
국적 폴란드

요약 폴란드의 왕(1674~96 재위).
(영). John Ⅲ Sobieski.

얀 3세 소비에스키(Jan III Sobieski)

ⓒ Daniel Schultz/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선거를 통해 왕위에 올랐으며 오스만 투르크를 물리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을 잠시 동안 부활시켜 마지막으로 영화를 누렸다.

초기생애와 활동

그의 조상은 하급 귀족이었으나 고조부는 유명한 군사령관인 성(聖) 주우키에프스키였다.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야쿠프(1588~1646)는 좀더 높은 지위에 올라 왕실 내의 관직을 맡기도 했으며, 생애 말기에는 크라쿠프의 성주(城主)까지 되었는데, 이는 그를 폴란드 상원에서 최고지위, 즉 의회의장직을 보장해주는 자리였다.

소비에스키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당시 폴란드 귀족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어린시절에 서유럽을 여행했다. 1655년 스웨덴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그는 폴란드 왕 얀 카지미에슈에 맞서 스웨덴측에 가담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다시 진영을 바꾸어 스웨덴 병력을 축출하는 전투에서 지휘자로 활약했다.

1665년 그의 후견인이었던 마리아 루드비카 왕비의 영향력에 힘입어 대장군이라는 명예스런 지위에 임명되었다. 1666년 폴란드 육군 야전사령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10월 포다이체(지금의 우크라이나 포드가이치) 근처에서 타타르족과 카자크족을 물리쳤다. 1668년 봄 바르샤바로 개선하자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665년 야심만만한 프랑스 출신의 젊은 미망인 마리 카지미르 드 라 그랑주 다르키엥(마리시엥카)과 결혼했다. 마리시엥카는 1668년 얀 카지미에슈 왕이 사임하자 자신의 남편이 왕에 선출되도록 계획을 꾸몄다.

1669년 귀족들이 미하우 비스니오비에츠키를 왕으로 선출함에 따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녀는 남편의 진급을 위해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도움을 얻으려고 애썼다. 소비에스키는 전방에 나가 있을 때 아내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현재 매우 흥미롭고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는데 마리시엥카가 보낸 답장들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미하우 국왕의 짧은 통치기(1669~73) 동안 소비에스키는 카자크족과의 전투에서 과거보다 더 많은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름을 날렸으며, 이와 동시에 미하우의 지위를 약화시키고자 노력했다.

당시 미하우 국왕은 프랑스에 대항해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지하는 정책을 폈다. 1673년 11월 미하우가 사망하고 같은 날 소비에스키는 초킴(호틴) 근처에서 후세인 파샤의 지휘를 받는 투르크족을 물리치고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소비에스키의 이같은 승리가 1672년 체결된 부차츠 평화조약(폴란드는 투르크족에게 영토를 양보하고 상당한 액수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음)에 따른 비참한 상황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으나, 이로 인해 명성을 얻은 그는 1674년 5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지를 받는 후보를 누르고 왕에 선출되었다.

애초 그는 친(親)프랑스 노선을 추구했다.

프랑스의 중재로 투르크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했으며 1675년 6월 프랑스와 비밀리에 야보루프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그는 투르크 세력과 평화조약을 맺은 뒤 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에 대항해 싸울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1676년 10월 주라브노에서 투르크와 휴전이 체결되었을 뿐 상황은 부차츠 평화조약 때보다 약간 호전되는 데 그쳤다. 프랑스와 스웨덴의 지원을 받아 북서부에서 프로이센의 영토를 빼앗음으로써 남동부에서 투르크에게 당한 손실을 보상받으려던 그의 희망 역시 좌절되었다.

더욱이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마리시엥카의 프랑스 친척들을 왕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또한 소비에스키의 아들 야쿠프가 폴란드 왕위를 계승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 대귀족들, 특히 리투아니아 출신의 귀족들은 소비에스키가 프랑스의 도움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할까봐 우려했기 때문에 프랑스와의 동맹에 반대했다. 게다가 폴란드와 루이 14세의 이해관계를 서로 조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분명해졌다. 당시 루이 14세의 목적은 소비에스키를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서는 봉신쯤으로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별다른 불화가 없었으며 투르크족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받은 후에는 프랑스와 동맹관계인 오스만 세력을 가장 치명적인 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빈 구출

그는 항상 프랑스를 찬미했지만 프랑스와의 동맹관계를 청산하고 투르크족에 대항하기 위해 1683년 4월 1일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와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서 양측은 상대방의 수도가 적들에게 포위당할 경우 모든 역량을 동원해 상대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1683년 여름이 끝날 무렵 투르크의 막강한 군대가 빈으로 접근하자 소비에스키는 약 2만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직접 빈으로 달려갔다. 그는 빈을 위기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모여든 모든 군사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총 7만 5,000명에 이르는 지원군 병력의 지휘권을 떠맡게 되었다.

1683년 9월 12일 그는 칼렌베르크 전투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유럽 역사에 획을 긋는 결정적인 전투로 손꼽힌다.

그러나 1683년 가을 헝가리에서의 군사원정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레오폴트 황제와는 서로 상반된 정치 계획과 기질의 차이 때문에 관계가 나빠졌다. 소비에스키의 구상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지금의 루마니아)를 오스만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또한 흑해 연안까지 폴란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684~91년 그의 몰다비아 진출 작전은 거의 실패로 돌아갔으며, 마지막 작전에서는 포로가 될 뻔한 위험에 처하기까지 했다. 과거에 거둔 여러 차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해낼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가 죽은 지 3년 뒤인 1699년이 되어서야 1672년에 상실한 영토가 회복되었다. 1691년부터 1696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종종 중병에 시달렸으며 귀족들과 싸움을 벌여야 했고, 또한 자신의 가문 사람들과도 불화를 빚었다. 장남 야쿠프는 마리시엥카 왕비 및 어린 왕자들과 심하게 대립했다.

소비에스키의 아들 모두는 왕권 계승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 결과 레오폴트 황제나 프랑스측으로부터 도움을 얻고자 했다. 그의 딸 쿠네군다가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혼인한 일(1694)은 이처럼 혼탁한 몇 년 간의 세월에서 유일한 경사였다.

그의 집권 후반기는 초반기에 비해 훨씬 보잘것 없었지만 소비에스키와 마리시엥카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재산을 계속 늘려나갔다.

이들은 관직임명과 왕실의 총애를 베푸는 대가로 돈을 모았으며 소비에스키는 상당한 액수의 재산을 남기고 죽었다. 그는 주우키에프와 야보루프에 있는 자신의 거처와, 특히 바르샤바 근처의 빌라누프 궁전을 꾸미는 데 상당한 돈을 들였는데 빌라누프 궁전은 바로크 건축양식의 훌륭한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또한 시인과 화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는 17세기 폴란드의 모든 통치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문학과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유럽에서 오스만 세력과 투쟁하는 것은 그의 외교정책의 골간을 이루었으며 이같은 정책을 통해 여타 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폴란드와 적대관계였던 러시아가 투르크에 대항한 연맹에 가담하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내보이자, 소비에스키는 1686년 러시아와 '영구적' 평화조약(그지무우토프스키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따라 1667년 이후 잠정적으로 러시아가 통치하고 있던 키예프가 영구적으로 러시아에 양도되었다. 한편 1683년 이후 그가 겪은 온갖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남동부지역을 오스만과 타타르족의 공격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다.

그는 국내 정치 면에서는 거의 실패만을 거듭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군대를 안정시키려던 모든 노력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으며 아들들마저도 그와는 반대입장에 섰다. 1683년에 대단한 승리를 거둔 이후 귀족들은 국가 수호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리투아니아 출신의 세도가들은 투르크 세력과 싸우기보다는 서로 분쟁을 일삼았다.

소비에스키는 뛰어난 장군이자 조직의 명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문 내부의 반란과 신하들 사이의 분쟁 발생을 막을 수 없었으며, 이는 결국 18세기에 이르러 폴란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소비에스키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에서 그를 다소간 비극적인 인물로 간주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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