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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시대 왕의 특명을 받고 지방을 암행하면서 감찰하는 관리.
직지·수의라고도 하며, 이는 어사를 가리키는 말로 중국 한나라의 고사에서 기원한 용어이다. 그러나 암행어사는 조선의 독특한 제도였다.
기원
조선 초기부터 분대어사·행대·찰방·문민질고경차관 등 중앙에서 파견하는 감찰관이 있었다. 그러나 초기 암행감찰은 국왕과 신하 사이의 의를 깨치는 행위라 하여 금기시했다. 뿐만 아니라 추첨적간(국왕이 임의로 제비를 뽑아 감찰관을 파견할 지역을 정하는 것)이나 감찰관이 여염에 들어가 직접 민폐를 묻는 행위는 물론이고, 중앙에서 감찰관을 파견하는 자체도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다.
대신들은 감찰의 경우 왕이 한 도 행정의 전권을 위임한 관찰사가 전적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방관의 부패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성종 때부터 어사의 불시 파견이나 암행감찰이 용인되기 시작했다. 16세기에 들어 지방수령과 무장의 자질이 떨어지고 이들의 비리문제가 계속 커지자 마침내 암행어사가 제도화되었다.
암행어사라는 명칭은 1509년(중종 4) 11월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성종 말기에서 이 사이에 공식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점차 제도로 자리를 잡아 1581년(선조 14) 이이(李珥)는 반드시 암행어사는 비밀리에 임명하여 미행해야만 감찰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는 암행어사가 더욱 활성화하여 숙종에서 정조 때를 거치면서 임명방식·임무규정·운영방안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이결과 후기에 어사는 으레 암행어사를 지칭할 정도가 되었다.
운영방식
암행어사는 보통 당하관(堂下官)으로 젊은 시종신(侍從臣:대간·언관·청요직 등을 말함) 중에서 뽑았는데, 왕이 직접 임명하거나 의정부에서 왕의 명령을 받고 후보자를 선정하여 천거하면 왕이 그중에서 선정하여 임명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왕이 승정원을 통해 어사임명자를 불러서 직접 임무와 목적지를 알려주고 봉서·사목(事目)·마패·유척(鍮尺)을 주거나, 직접 면담하지 않을 때는 승지를 통해 봉서와 마패 등을 전달했다.
이때 대상으로 하는 고을은 왕이 제비를 뽑아 결정할 때가 많았다. 임명된 어사는 당일로 출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봉서는 어사의 임명장으로 어사의 임무도 함께 적었다. 겉면에 어사의 이름을 쓰지 않고 '동대문 밖에 나가서 열어볼 것'과 같은 문구만 적었다. 어사는 개봉하여 임무를 확인하고 목적지로 출발했다. 나중에는 별도로 어사의 임무를 적은 사목(事目)을 주었다.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에서 어사의 임무를 일괄로 규정했는데, 이를 〈암행어사재거사목 暗行御史齎去事目〉이라고 한다. 그러나 〈재거사목〉의 내용이 너무 많고 번거로와 사목이 일반화된 후에도 왕이 직접 봉서에 지역별로 중점적인 탐문사항이나 추가사항을 적은 사목을 별도로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마패는 역마를 사용할 수 있는 패로 원래는 지방에 나가는 관원에게 주었다.
그런데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는 암행어사는 역마를 이용할 필요가 없으므로 마패는 어사의 신분증과 같은 것이 되었다. 창고를 봉인할 때는 어사의 인(印)으로 대용하기도 했다. 마패는 병조에서 발급하지만 비밀유지를 위해 암행어사의 것은 병조를 통해 정식 발급 절차를 밟지 않고 승정원에서 보관했다가 내주었다.
마패는 1마패에서 5마패까지 있는데, 암행어사에게는 보통 2마패를 주었다. 유척은 국초부터 중요한 감찰사목이었던 각 고을의 도량형과 형구의 규격 검사를 위해 지급하는 것으로 2개를 주었다. 처음에 비용은 암행어사가 자급했는데, 후기에는 정부에서 일정하게 지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행은 중앙 각사의 서리(書吏)나 역졸(驛卒)을 어사가 직접 골라 몇 명씩 대동하는 것이 관례였다. 군관을 차정해 가는 것은 금지했는데, 실제로는 우수한 무사의 필요성에서 이들을 선발해 가는 사례가 꽤 있었던 것 같다.
임무와 수행방식
초기의 암행어사는 명령받은 고을만 감찰할 뿐 지나가는 읍의 불법은 보고할 수 없었으며, 임무도 전통적인 감찰사목인 형정·부세불균·군기점검·도량형·금령준수 등 수령의 업무수행 상황, 수령·향리·토호의 불법행위를 단속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이같은 방식은 숙종 때를 계기로 크게 바뀐다.
1681년(숙종 7)에 암행어사의 임무를 새로 규정했는데, 어사가 고과 공정 등 관찰사의 업무수행까지 감찰하며, 지금까지 수령의 임무였던 문무의 인재나 효행이 탁월한 자, 환과고독이나 100세 이상인 자, 또는 패상자나 백성의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 및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를 적발하여 보고하는 일을 어사가 직접 행하게 했다. 정조 때에는 어사가 지나가는 고을의 불법사도 염찰·보고하게 했으며, 부세관계 규정이 많아졌다. 이로써 어사는 수령비리 적발의 차원을 넘어서 읍폐 전반을 직접 처리하는 사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어사의 임무수행 방식은 출도와 복명으로 나뉜다.
출도는 어사가 직접 관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통 역졸이 마패로 문을 두드리며 '어사출도'를 외쳤다고 한다. 출도는 관아로 하는 경우도 있고, 성문이나 누에서 하기도 하는데, 출도의 시기·방법·복장은 어사의 편의에 따르도록 했다. 출도한 어사는 백성의 진정을 수리하고, 장부와 창고를 검열하여 부정이 분명히 드러나면 창고를 봉인하거나 수령을 처벌했다. 이때 어사가 먼저 직권으로 파면하고 왕에게 계문하기도 하고, 어사의 보고를 받고 추고하여 처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사의 역할은 출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출도는 지정된 고을에서만 할 수 있는데, 반드시 출도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잠행순찰만 할 수도 있었다.
복명은 어사가 사명을 바치고 돌아와 보고서를 바치는 것이다. 보고서에는 서계와 별단이 있다. 서계는 조목별로 지정받은 임무에 대한 수행결과인 사찰결과를 적고 자신이 탐문한 감사·수령·만호·진장 들의 치적을 적었다. 별단은 어사가 본 각읍의 폐단과 민폐를 총괄적으로 보고하고 자신의 견문과 교양을 동원하여 개선책까지 개진하는 것으로 시무책과 같은 것이다.
숙종 때까지는 서계가 중시되었으나 어사의 역할이 변함에 따라 영조·정조 때에는 별단의 비중이 높아졌다. 별단은 어사의 인물을 평가하는 자료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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