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위치 | 이탈리아 북동부 우디네 주 남부, 나티소네 강 유역 |
---|---|
인구 | 3,150명 (2024년 추계) |
면적 | 37.44㎢ |
언어 | 이탈리아어 |
대륙 | 유럽 |
국가 | 이탈리아 |
요약 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지방 우디네 주에 있는 마을. 옛 로마 제국의 도시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총대주교구였다. 아드리아 해안 근처 나티소네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트리에스테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옛 로마 제국의 도시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총대주교구였다. 아드리아 해안 근처 나티소네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트리에스테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BC 181년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로마의 수비대 주둔지로 세워진 이곳은 북쪽과 동쪽으로 일리리아·판노니아·노리쿰 등의 로마 속주들로 이어지는 도로들과 포스투미아 가도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어 군사 요충지로서 뿐만 아니라 상업 중심지로서도 급속히 발전했다. 4세기에 베네치아와 이스트리아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167년 게르만계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의 포위 공격을 받았으며, 452년 훈족에게 넘어가 약탈당했다. 568년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베네치아 본토를 정복하면서 이곳의 정치적·경제적 중요성은 쇠퇴했으며 롬바르드계 프리울리 공작령에 합병되었다.
주교관구는 3세기 중엽에 성 마르쿠스가 설립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5세기에 베네치아, 이스트리아 및 북쪽·동쪽의 외곽지역을 포괄하는 수도대주교관구가 되었다. 533년 교황 비길리우스가 〈3장〉(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교회정책을 토대로 한 이단적 저술)에 대하여 유죄를 선언하자 이곳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탈퇴했으며, 주교 마케도니우스는 교황을 무시하고 스스로 총대주교 직위에 올랐다. 롬바르드족이 침략해온 후 총대주교 파올리노 1세가 그라도(아퀼레이아의 초기 전진항구)로 도망감으로써 이 주교관구는 분열되었다.
607년 로마 가톨릭 교회에 충성스러웠던 칸디아누스가 그라도에서 수도대주교로 선출되자 롬바르디아 본토의 속교구사제들은 이곳에서 요한네스를 대수도원장으로 선출했으며, 그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분파정책을 채택했다. 이러한 분파는 교황 세르기우스 1세의 재임기간(687~701)중에 파비아에서 열렸던 공의회에서 드디어 막을 내렸다. 그뒤부터 아퀼레이아와 그라도는 별도의 주교관구·총대주교구로 인정받았다. 총대주교의 관저는 보안을 이유로 627년 코르몬스로 옮겨졌고 그후 730년에 다시 치비달레로 옮겨졌다.
주교 파올리노 2세(802 죽음)가 아바르족과 슬로베니아인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했던 것이 이곳의 종교적 지위를 더욱 높여주었으며 11세기에 들어서는 주로 독일 왕들에게서 폭넓은 정치적 특권과 봉토를 부여받았다. 아퀼레이아에 바실리카 테오도리아나(1021~31)를 세운 포포네 주교는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으며 주교관구에는 프리울리 백작령, 카르니올라 경계지역(1077), 이스트리아 경계지역(1209) 등이 부여되었다.
1419~20년 베네치아가 프리울리를 정복하기 전까지 이곳은 봉건 영지로 남아 있었다. 1445년 협정에 따라 총대주교는 마침내 베네치아의 정복을 인정했고 그 결과 아퀼레이아·산비토·산다니엘레델프리울리 만을 소유하게 되었다.
15세기 이래로 베네치아인들이 총대주교직을 독점했다. 1751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가 이 총대주교구를 폐지하고 대신 우디네와 고리치아 대주교관구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아퀼레이아는 이곳 대성당과 함께 다시 교황의 관할에 있게 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유럽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