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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3. 4. 25, 콘스탄티노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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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1. 6. 25, 콘스탄티노플 |
국적 | 오스만 |
요약 오스만의 술탄(1839~61 재위).
귀족원 칙령(Hatt-i Şerif of Gülhane:1839)과 제국 칙령(Hatt-i Hümayun:1856)으로 알려진 2개의 주요 사회·정치 개혁령을 공포했는데 이 두 칙령 모두 탄지마트(Tanzimat:재정비)의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좋은 교육을 받고 자유로운 정신을 지녔으며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최초의 술탄이었던 아브뒬메시드는 아버지 마무드 2세의 개혁계획을 계속 추진해나갔으며 대신 무스타파 레시드 파샤, 메메드 에민 알리 파샤, 푸아드 파샤로부터 강력한 보조를 받았다. 이 개혁령들은 부분적으로는 유럽 열강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것으로서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을 선언하고 그리스도교도에게도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개혁의 주요목적은 어디까지나 오스만 국가를 유지하는 데 두었다. 군대를 재조직하면서(1842) 징병제를 도입했고 새로운 형법·상법·해상법을 공포했으며 유럽인과 오스만인 재판관으로 이루어진 민사·형사의 복합법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1858년에는 소유권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토지법을 발표했고 중앙집권화한 새로운 지방행정제도의 설립을 시도했다. 교육개혁으로는 교육부의 창설과 군사 예비학교 및 중등학교의 설립을 들 수 있다. 또 그는 파리에 오스만 학교를 세웠다(1855).
아브뒬메시드의 대외정책은 오스만 국가의 영토적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럽 열강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오스만이 니지프 전투(1839. 6)에서 이집트의 부왕에게 패배한 며칠 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유럽 열강들과의 동맹(프랑스 제외)에 의해 겨우 이집트 측에서 제시한 절망적인 조건들(런던 조약[1840. 7])로부터 오스만을 구할 수 있었다. 1849년 아브뒬메시드는 로요슈 코슈트를 비롯한 헝가리 출신 망명 혁명가들을 오스트리아 정부에 인도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유럽 자유주의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1853년 마침내 오스만은 러시아에 대항한 크림 전쟁에서 프랑스·영국·사르데냐의 지원을 받았고 파리 조약(1856)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 열강들은 오스만 제국 내의 그리스도교도들과 소수민족을 겨냥한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중앙집권화나 발칸의 보스니아 및 몬테네그로 지역에서 지배력을 회복하려는 술탄의 노력을 방해했다. 또 이들은 레바논에 자율권을 부여하도록(1861) 오스만에 요구한 반면, 파리 조약으로 도나우 공국들을 통일하여 루마니아 독립(1878)을 위한 길을 닦았다.
아브뒬메시드는 하기아소피아 교회를 복구하고 돌마바체 궁을 세웠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처음으로 프랑스식 극장을 만들었다.→ 레시드 파샤, 알리 파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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