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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0. 2. 9, 콘스탄티노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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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6. 6. 4, 콘스탄티노플 |
국적 | 오스만 |
요약
오스만의 술탄(1861~76 재위).
정식 이름은 Abdlaziz Oglu Mahmud Ⅱ.
선왕(先王)이 시작한 서구화 개혁을 1871년까지 계속 추진했지만 나중에는 전제정치로 돌아섰다.
1861년 6월 25일 그의 형인 아브뒬메시드 1세를 계승하여 술탄이 되었다. 형과 마찬가지로 그는 서구 물질문명 진보에 대한 열렬한 찬양자였다. 그러나 오스만 전통에 따라 교육받은 그는 서구의 제도와 관습을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아브뒬라지즈는 데르비시(dervish:이슬람교의 신비주의자)의 마울라위야(Mawlawiyah:또는 Mevlevi) 교단의 일원이었다. 1861~71년 개혁은 아브뒬라지즈의 유능한 총리들인 푸아드 파샤와 알리 파샤의 지도 아래 추진되었다. 새로 주 행정구역을 만들었고(1864), 프랑스의 권유로 국무협의회를 구성했다(1868). 프랑스 제도를 본떠 공공교육을 시행했고 대학도 설립했으며, 오스만 제국 최초로 민법전을 포고했다. 아브뒬라지즈는 프랑스·영국과 관계를 돈독하게 다졌으며 오스만 술탄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유럽을 방문했다.
1871년 총리였던 푸아드와 알리가 모두 죽고 서구의 모범으로 간주했던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했다. 외고집인 아브뒬라지즈는 그의 권위를 제어하던 강력한 총리들이 사라졌으므로 실질적인 군주로 변신하여 제국의 이슬람적 성격을 크게 강화했다. 대외정책에서는 발칸 지방에 혼란이 계속되자 러시아와 친교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반란이 불가리아로 확산되자(1876) 러시아가 반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악감정이 높아졌고, 1873년의 흉작과 술탄의 재정 낭비, 그리고 국가 부채의 누증은 사회 불만을 고조시켰다. 아브뒬라지즈는 1876년 5월 30일 신하들에 의해 퇴위당했다. 불과 며칠 뒤에 그는 죽었는데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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