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02. 8. 5, 노르웨이 스타방게르 근처 피뇌위 섬 |
---|---|
사망 | 1829. 4. 6, 프롤란드 |
국적 | 노르웨이 |
요약 아벨은 근대 수학의 여러 분야를 발달시킨 수학자로 자신의 수학적 업적을 인정받기도 전인 28세에 요절했다. 오슬로의 대성당 학교 재학시에 그의 수학적 재능을 발견한 수학교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아이작 뉴턴을 비롯한 저명한 수학자들의 저서를 연구했다. 스승의 재정도움으로 학업과 연구를 계속하여 1823년에 함수방정식과 적분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했다. 그 후 독일에서 훗날 아벨의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어줄 크렐레를 만났다. 1826년에는 초월함수에 대한 논문을 완성하여 대수함수 적분론, 아벨 정리로 알려진 결과 등을 담았다. 파리에서 결핵 진단을 받고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는 가난 뿐만 아니라 나빠진 건강과도 싸우며 연구를 이어가 방정식 이론과 타원함수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1828년 가을에 병이 악화되어 그 이듬해에 생을 마감했다.
근대 수학의 여러 분야를 발달시킨 선구자이다.
가난한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아들이었던 아벨은 태어나자마자 가족이 노르웨이 남동쪽에 있는 리쇠르 마을 근처의 예르스타드 교회로 옮겼으므로 그곳에서 성장했다.
1815년 오슬로의 대성당 학교에 들어갔을 때 수학적 재능이 교사의 눈에 띄었는데, 교사는 그에게 고전수학 문헌을 소개하고 독창적인 문제들을 풀라고 제시했다. 강하게 자극받은 그는 17세기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과 그당시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독일),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프랑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독일)의 저서를 연구하고 그들 수학 논법의 차이를 찾았다.
1820년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가족은 궁핍한 생활을 했지만, 1821년 그는 스승의 재정 도움으로 크리스티아나(오슬로)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1822년 대학에서 예비 학위를 받았고, 스승의 계속적인 보조금으로 독자적인 연구를 계속했다. 1823년에 발표된 첫 논문은 함수방정식과 적분에 관해서였고, 적분방정식에 대한 최초의 해(解)를 내놓았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연구하도록 노르웨이 정부에 장학금을 요청했다.
국왕의 포고를 기다리는 동안 1824년에는 5차방정식을 대수적으로 풀 수 없음을 증명하여 자비로 출판했고 이것이 인정받기를 바랐다. 그는 이 소책자를 가우스에게 보냈으나, 가우스는 유명한 문제가 실제로 해결되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를 무시했다. 1825~26년의 겨울을 베를린에서 고국의 친구들과 함께 보내면서 토목공학자이며 독학을 한 수학광인 아우구스트 레오폴트 크렐레를 만났는데, 그는 훗날 아벨의 절친한 친구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아벨의 따뜻한 격려로 크렐레는 〈순수 및 응용 수학 저널 Journal für die reine und angewandte Mathematik〉을 창간했고, 1826년 초판에 5차방정식에 관한 더 정교한 이론이 포함된 아벨의 논문들을 실었다. 다른 논문에서는 방정식이론, 함수방정식, 유한형식의 적분법, 이론역학 문제 등을 다루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수학의 새로운 추세에 자극받아 더욱 독자적인 연구를 계속했으나, 사회가 혼란스럽게 되자 곧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1826년 여름에 파리에 도착한 뒤 가장 뛰어난 수학자들을 방문했고 초월함수에 대한 논문을 완성했다.
이 주요논문에는 대수함수 적분론, 특히 아벨 정리로 알려진 결과 등이 들어 있다. 이 정리는 나중에 아벨 적분론과 아벨 함수론의 기초가 되었다. 파리에서는 아벨의 연구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절제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는 명성을 얻기 위해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할 연구논문집을 보냈으나 성과가 없었다. 파리를 떠나기 전에 만성감기로 의사를 찾아갔는데, 진찰 결과가 결핵으로 나왔다.
그는 많은 빚을 지고 노르웨이로 돌아와서, 가정교사, 대학으로부터의 약간의 보조금, 그리고 1828년에는 대리교사 자리를 얻어 그럭저럭 살았다.
가난과 나쁜 건강에도 그의 활동은 줄지 않았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주로 방정식이론과 타원함수에 관해 많은 논문을 썼다. 이중에는 아벨군과 아벨 방정식 이론이 있다. 그는 카를 구스타프 야코비와 겨루어 타원함수 이론을 서둘러 전개했다. 이때 아벨의 명성이 모든 수학연구기관에 알려져서, 프랑스 아카데미의 한 모임에서는 그가 적당한 자리를 얻도록 노르웨이-스웨덴의 왕 바르나도테에게 소원(訴願)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크렐레는 베를린에서 그를 위한 교수직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했다.
1828년 가을에 병이 악화되었으며, 크리스마스에 프롤란드에 있는 약혼녀를 만나러 썰매여행을 한 뒤 상태가 나빠져 그곳에서 죽었다. 1841년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그의 연구논문집을 출판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과학자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