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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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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61. 5. 27,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
국적 | 스코틀랜드 |
요약 스코틀랜드의 반왕당파지도자.
잉글랜드 왕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에 벌어진 내란(청교도 혁명) 때 활약했으며 스코틀랜드를 잠시나마 정치적·종교적으로 잉글랜드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했다.
1626년 추밀 고문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1637~38년 스코틀랜드의 감독제 폐지를 주장하고 찰스 1세가 잉글랜드의 예배의식을 강요하는 것에 대항해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지키기로 맹세하는 국민서약에 서명함으로써 왕의 총애를 잃었다.
정치적 주도권을 획득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왕당파 지도자 몬트로즈 백작 제임스 그레이엄과 심하게 반목했는데 그는 계속 정치적인 책략에서 그레이엄을 제압했다. 1638년 아버지의 아가일 백작작위를 이어받았으며 1641년 찰스 1세가 서약파에 대한 양보의 일환으로 취한 조치로 후작작위를 받았다. 그후에는 당시 장로파가 지배하고 있던 잉글랜드 의회파와 동맹수립에 착수했다.
그의 부대가 1644년 의회파 편에 서서 북부 잉글랜드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그는 스코틀랜드에 남아 몬트로즈를 방어했다. 그는 1645년 2월 인버로치에서, 그리고 8월에는 킬사이스에서 몬트로즈에게 패했으나 9월 13일 필러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648년 스코틀랜드 왕당파가 잉글랜드 침공에 실패하자 그는 에든버러에 새 정부를 세우고 의회파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크롬웰 휘하의 독립파가 찰스 1세를 처형해(1649. 1. 30) 스코틀랜드인들의 반감을 삼으로써 동맹관계는 끝이 났다.
아가일은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서약파들이 찰스 1세의 아들을 스코틀랜드로 초빙하는 것을 묵인하고 1651년 1월 1일 그를 국왕 찰스 2세로 즉위시켰다. 찰스 2세가 1651년 9월 잉글랜드에서 패하자 아가일도 크롬웰에게 굴복했다. 크롬웰이 죽자 1660년 찰스는 마침내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고 곧바로 아가일을 크롬웰의 공화국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체포해 이듬해 에든버러에서 참수시켰다. 아가일의 생애를 자세히 기록한 책으로 존 윌콕의 〈위대한 후작 The Great Marquess〉(190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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