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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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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50. 5. 21,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
국적 | 스코틀랜드, 영국 |
요약
영국내란(청교도혁명) 때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의 찰스 1세를 위해 싸워 여러 차례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던 스코틀랜드의 장군.
Earl of Kincardine, Lord Graham and Mugdock이라고도 함.
1626년 아버지의 몬트로즈 백작작위를 물려받았으며 세인트앤드루대학에서 공부했다.
1637년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 국교 예배의식을 강요하려는 찰스 1세의 시도에 맞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보호를 서약하는 헌장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왕당파였으므로 스코틀랜드의 강력한 반왕당파 지도자인 아가일 백작 8세(나중에는 아가일 후작 1세) 아치볼드 캠벌의 숙적이 되었다.
서약파군에서 싸우면서1640년 8월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점령했으나 아가일과의 정치대결에서 패해 1641년 6월에서 11월까지 에든버러에 감금당했다. 1644년 서약파들이 왕에 대항하는 잉글랜드 의회의 편에 서서 잉글랜드를 침공했을 때 찰스는 그를 스코틀랜드군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3개월 뒤에는 몬트로즈 후작(그리고 킨카르딘 백작)작위를 수여했다.
1644년 8월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로 진군한 그는 하일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을 규합해 탁월한 전술로 한 해 동안 티버뮤어·애버딘·인버로치·올던·앨퍼드·킬사이스 등의 주요전투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찰스는 그를 스코틀랜드의 부총독 겸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1645년 6월 왕당파군이 네이즈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자 그의 군대는 와해되었고, 9월에는 필리포에서 잔여부대마저 괴멸당했다.
1646년 유럽 대륙으로 도망쳤으나 망명해 있던 찰스 2세의 배려로 1650년 3월 1,200여 명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4월 27일 카비스데일 전투에서 패배한 그는 지난날 그를 보호해주겠다고 했던 애신트의 닐 매클라우드 때문에 붙잡혀 5월 에든버러 시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능지처참당했다. 마지막까지도 그는 자신이 충신이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서약파였음을 항변했다.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뒤 그의 아들 제임스는 몬트로즈의 작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후작작위는 1707년에 공작작위가 됨). 전기로는 존 버컨과 웨지우드가 지은 책이 1913, 1952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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