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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945경, 프랑스 오베르뉴 오리야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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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003. 5. 12, 로마 |
국적 | 바티칸시티 |
요약
프랑스인 교황(999~1003 재위).
본명은 Gerbert of Aurillac.
목차
접기개요
학문적인 업적, 교육활동, 예리한 정치적 판단력 등으로 유명하다.
초기생애와 성직 경력
프랑스의 유서 깊은 지방 오베르뉴에 있는 오리야크 근처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생제랄에서 레이몽 라보르에게 문법·산수·음악을 배웠다.
라보르는 후에 오리야크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이 되었고 제르베르는 그곳에서 수도사가 된 듯하다. 967년 바르셀로나의 보렐 백작을 따라 스페인에 가서 3년간 있으면서, 좋은 도서관으로 유명한 리폴의 산타마리아 수도원에서 비크의 주교 아토의 지도로 4과목(음악·산술·기하·천문학으로 구성되는 고등 교양과목)을 공부했다. 970년 보렐을 따라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제르베르의 수학 지식에 반한 교황 요한 13세는 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뒤 최초의 궁정 학생 오토 2세의 교육을 맡게 되었으나, 소크라테스 방식대로 활발한 토론을 하면서 논리학 훈련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능숙한 논리학자인 랭스의 대부제 제랑이 로마를 방문하자 허락을 얻어 랭스로 가서 제랑에게 배우게 되었다. 논리학과 변증법에 매력을 느낀 그는 아달베로(후에 그에게 사제 서품을 준 인물)의 초청을 받아 성당학교에서 가르친 이후에 논리학과 변증법 연구를 재구성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점차 그는 단순한 논리학 수업을 없애고, 6세기초 로마의 철학자 보에티우스의 논리학을 보완했다.
제르베르가 유명해지자 질투심에 사로잡힌 작센 마크데부르크의 성당학교 교장 오트릭은 그를 황제 오토 2세에게 고소했다. 980년 12월 오토는 라벤나에서 지식을 분류하는 주제를 가지고 제르베르와 오트릭 간의 토론회를 열었다. 두 사람은 너무 열정적으로 논쟁을 벌여 황제가 개입한 후에야 토론을 끝마쳤다.
오토는 그후 제르베르에게 보비오(이탈리아 피아첸차 남서부)의 부유한 성 골룸바노 수도원의 수장권을 주었고, 베네딕토 7세는 그를 이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으로 축성했다. 그러나 제르베르는 행정 경험이 없었고 롬바르디아 지역의 토지법도 잘 몰랐다. 그결과 장기간의 토지 임대를 통해 보비오의 막대한 재산 가운데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임금계약을 맺거나 오토가 요구한 군대를 지원하기를 거부하고 있던 수도사·성직자·귀족 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받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대수도원의 농산물을 훔쳐가기도 했다. 파비아(피아첸차의 서부)에 있는 오토의 궁정 안에서도 귀족들은 제르베르에 대해, 심지어 오토에 대해서도 음모를 꾸몄다. 오토가 죽은 뒤(983. 12) 반란이 일어나자 제르베르는 보비오에서 서둘러 도망쳐나와 랭스로 갔다.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절박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써서 당시 3세밖에 안 된 오토 3세를 사로잡아 왕이 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던 바이에른의 공작이자 전쟁광 하인리히 2세에 대항하여 봉기하도록 게르만인·벨기에인·로렌인 들을 설득했다.
제르베르는 랭스에서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으나, 실제로는 황궁으로 초빙되어 가는 것을 원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들이 죽은 뒤(로타르는 986, 루트비히 5세는 987), 아달베로와 제르베르는 귀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카롤링거 왕조의 유족인 로타링기아(로렌)의 공작 샤를의 왕위계승권 요구를 묵살하고 위그 카페 공작을 왕으로 선출하도록 했다.
위그의 비서이자 고문이었던 제르베르는 샤를이 위그를 폐위시키려 하자 위그와 함께 이에 대항했다. 989년 1월 아달베로는 죽기 전에 제르베르를 자기 후임자로 지목했으나, 위그는 어리석게도 왕 로타르의 서자(庶子) 아르눌프를 선출했다. 그해 9월 아르눌프는 랭스를 자기 삼촌 샤를에게 팔아넘겼고, 샤를은 제르베르에 대해 그 도시를 떠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8개월 뒤 제르베르는 간신히 도망쳐나와 위그의 궁전으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공작 샤를과 모의하여 '극악한 범죄'를 저질러왔다는 거짓 고소를 당했다.
990년 6월 주교들과 위그는 교황 요한 15세에게 아르눌프를 단죄하여 물러나게 하고 그들이 새로운 대주교를 축성한 것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991년 3월 위그가 샤를과 아르눌프를 체포한 뒤, 랭스 근처에 있는 생발드 베르지에서 공의회를 열어 아르눌프를 파면했다. 제르베르는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곧 교황청과 불화를 겪게 되었다. 그는 대주교 직무를 능숙하게 처리해 갔으나 성직자들은 점차 그를 선출할 때 밟은 절차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마침 새로 선출된 주교가 제르베르에게 축성받기를 거절하고 교황에게 축성을 받으려고 로마로 먼 길을 여행하는 일이 생기자, 제르베르는 서둘러 로마로 달려가 자기가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대주교가 되었음을 변호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교황 요한은 죽었고, 따라서 제르베르는 후임교황 그레고리오 5세에게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
파비아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온 뒤 제르베르는 당시 16세의 나이로 황제가 된 오토 3세를 만났다. 그의 재기(才氣) 넘치는 지성에 호감을 갖게 된 황제는 즉시 자신의 편지들을 작성하는 데 그의 재능을 빌려 썼다. 그러나 996년 8월 5일 두 사람은 마지못해 헤어졌다.
997년 1월에 개최된 공의회는 과거에 아르눌프를 물러나게 하는 데 가담했던 모든 주교들을 그 직위에서 해임시키기로 결정했다. 4월 무렵 제르베르는 성직자들이 이 법령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랭스를 떠나 아헨(지금의 독일에 있음)에 있는 오토의 궁정으로 가서 다시는 프랑스로 돌아오지 않았다. 제르베르는 다시 교사가 되었고, 오토의 예배당 음악가가 되었으며, 오토 3세와 함께 마크데부르크를 여행하면서 시계를 만들어 창의성을 과시했다. 그해 10월에는 오토를 따라 이탈리아로 갔는데, 그곳에서 오토는 그를 이탈리아 통제를 위한 중요한 도시인 라벤나의 대주교로 임명했다(998년 4월경). 그는 황제를 설득해 이탈리아에 새로운 농업정책을 시행하도록 했으며, 그 내용은 보비오에서 실패했던 장기 임대 관습을 폐지하고 임대기간을 임대자인 대수도원장이나 주교의 생존기간으로 한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토 3세가 재위기간에 이탈리아에 시행한 가장 중요한 입법인 듯하다.
교황직
제르베르가 라벤나 교구를 맡은 지 1년이 안 되어 그레고리오 5세가 죽었고, 따라서 오토 3세는 제르베르를 그레고리오의 후임 교황으로 선출했다.
999년 4월 9일 교황 축성을 받았는데, 그는 프랑스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황이 되었다. 교황명으로 실베스테르 2세라는 이름을 택한 제르베르는 그리스도교 로마 제국을 재건한다는 오토의 이상에 협력하겠다고 선언했다. 오토와 제르베르가 뜻을 같이했다는 것은 교황청과 황궁의 공문서 보관청이 발행한 수많은 문서에 비슷한 용어들이 쓰였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문서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 대해 중재자의 역할을 해주었으며, 또한 상대방이 소집한 여러 공의회에 참석했다.
그들이 뜻을 달리한 경우는 공작 볼레스와프를 폴란드의 왕으로 세우는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 했던 때밖에 없었다. 실베스테르는 그니에즈노를 독일로부터 독립된 관구로 세우는 것에는 동의했으나, 볼레스와프를 왕으로 세우려는 오토 3세의 계획은 반대했다. 그러나 실베스테르는 이슈트반을 헝가리의 왕으로 세우고 헝가리를 독립 관구로 세우는 데에는 동의했다. 1002년 1월 23일 오토 3세가 갑자기 죽자 두 사람 사이의 긴밀한 협력은 막을 내렸다. 실베스테르는 교황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키예프의 대공(大公)이자 훗날 러시아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군주 블라디미르 1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리스도교를 노르웨이의 공식 종교로 삼은 노르웨이의 왕 트리그바손 올라프 1세에게 '룬' 문자(고대 북유럽의 문자)를 쓰지 말 것을 요구했고, 달마치야(지금의 크로아티아 해안지대)에 대사들을 파견했으며, 베네치아의 도제와 그라도(이탈리아 북동부 해안)의 총대주교에게 베네치아 성직자들의 도덕적 문란함을 견책했다. 1년에 2번씩 총회를 소집했으며, 아르눌프를 랭스 대주교직에 복권시킴으로써 오래 끌어온 랭스 분쟁을 끝냈다.
폴란드에 최초의 대주교를 임명했고(1000), 성직매매와 족벌주의를 비판했으며, 성직자들에게 독신을 요구했다. 주교들과 귀족들이 부유한 대수도원들에 대해 간섭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대수도원들은 실베스테르에게 교황청을 제외한 모든 외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의 요청 가운데는 대수도원장을 자기들의 손으로 선출할 수 있게 해달라는 중요한 권리요청도 들어 있었다.
실베스테르는 이 요청에 응함으로써 주교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반면 교황의 세력을 강화시켰다. 그는 교황청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테라치나의 백작 다이페리오에게 군대를 지휘한 대가로 봉토(封土)를 수여함으로써 교황청을 봉건화하기 시작했다.
실베스테르는 1003년에 죽었는데 죽은 즉시 그의 위대한 학식에 대한 전설이 널리 퍼졌다. 이것은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인상을 남겼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높은 학식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가 스페인에 있을 때 배운 마술에 의한 것이라고 했고, 몇몇 사람들은 마귀가 시킨 일이라고도 했다.
평가
그는 대학자이자 좋은 교사였으며, 여러 가지 실용적인 학습방법들을 고안했다.
이를테면, 수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표를 만들었고, 계산기에 대한 글을 썼으며(이것은 이 주제에 관한 기본서가 되었으며 지난날 스페인에서 배운 힌두-아라비아 숫자들을 사용했음), 천구의(天球儀), 즉 천체의 궤도들을 연구하기 위한 반구체를 만들었으며, 별자리를 찾고 행성궤도를 나타내기 위한 보조구들을 만들었다. 그는 아스트롤라베(고대 그리스의 천체 관측기)를 얻어 그것의 용도에 관한 글을 썼다. 또한 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글은 단편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고자 기하학에 관한 책을 썼는데, 그는 로마 측량사들이 남긴 글도 여기에 포함시켰다.
그는 음악에 탁월한 지식이 있었으며, 여러 대의 오르간을 조립하고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한 일현금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학 논문 〈이성과 이성 사용에 관하여 De rationali et de ratione uti〉에서는 지식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문제들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사본 수집광이었다.
모아놓은 사본들을 4~5개의 상자에 넣어 봉인했는데, 이 사본들 중 3개만 출처를 알 수 있다. 또한 자기가 쓴 편지들의 사본도 보관했으며, 모두 훌륭한 라틴어로 씌어 있다. 그가 직접 수집해놓았던 사본들은 소실되었고, 그중 2개의 사본만 남아 있다. 그 당시에 씌어진 그의 전기는 단 1편만 현존하는데 이는 생레미의 리셰가 쓴 것으로, 리셰는 제르베르가 '하느님의 명령으로' 랭스로 파송되었다고 믿었다(이 전기는 오늘날에 와서야 독일 밤베르크에 있는 대성당 도서관에서 발견되었음). 그러므로 오랫동안 학자들조차도 제르베르에 대한 이야기를 구전에 의존했다.
현대 학자들은 여전히 제르베르를 10세기말의 뛰어난 인물로 보는데, 특히 그의 편지들의 정확한 날짜를 파악하는 것과 그의 정치적인 역할, 가르침(특히 논리학·변증학·수학·천문학), 아랍 학문의 전파, 오토 3세와의 관계, 교황직, 그가 후세대에 미친 영향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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