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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화와 중화민국의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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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 3진이 혁명파에 의해 장악되고 청조의 군대가 혁명군에 대한 초기의 진압에서 실패하자, 청조는 은퇴해 있던 한인관료 위안스카이에게 내정과 군정의 전권을 위임하여 그를 총리로 기용함으로써 혁명군을 진압하고자 했다. 위안스카이는 초기에 한커우·한양을 수복하기까지 무장진압정책을 써서 혁명군의 위력에 타격을 입혔으나 그후 타협을 모색했다.

이는 위안스카이가 청나라 타도 쪽으로 돌아선다면 그를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겠다는 혁명군측의 결의가 이루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그로서는 굳이 승산이 불투명한 내전을 확대하여 청나라를 보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남북의 양군은 12월 3일 이후 계속 정전상태로 들어갔고, 18일부터 상하이에서 정식으로 남북의화가 개시되었다.

양측 대표의 담판과정에서 남방의 혁명군측이 29일 난징[南京]에서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세우자 담판은 일시 중지되었다. 그러나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조건부로 총통직을 양보하겠다는 제안을 한 후 양자 간의 담판은 계속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퇴위를 실현시켰고,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宣統帝]는 퇴위조를 내림으로써 268년에 걸친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다음날 쑨원은 사직했고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쑨원은 사직의 조건으로 난징에 임시정부를 설치할 것을 내세워 위안스카이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2월말에 베이징 등지에서 일어난 병변을 구실로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3월 10일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4월 1일 쑨원은 정식으로 임시대총통직에서 해제되었고, 5일 참의원(參議院)이 베이징으로 이전을 결의했다. 이로써 혁명파의 위안스카이 견제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혁명파는 혁명의 궁극적인 목표의 하나인 정권장악에 실패하고, 구세력인 위안스카이가 정권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신해혁명 이전의 낡은 사회적·경제적 질서나 지배계층, 반식민지적인 중국의 국제적 위치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해혁명은 '실패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실패의 궁극적인 원인으로는 당시 사회적 기반 자체가 미성숙한 단계에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신해혁명을 문제제기 단계로 보고 실질적인 내용은 그 이후의 단계에서 갖추어진다고 보아, 신해혁명을 '민국혁명'의 제1단계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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