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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5, 경기 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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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국적 | 북한 |
요약 만담가·연극인.
본명은 신흥식. 일제강점기 날카로운 정치풍자와 풍성한 해학으로 만담가로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천민 출신으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0세 무렵 상경해 연극계에 입문했다. 당초 극작가 겸 배우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1930년 '조선연극사'에 극작가로서 가담했고, 1931년 가을에 조직된 극단 '신무대'에서는 배우 겸 극작가로서 중추적 활동을 했으며, 악극단에 대본을 제공하기도 했다.
1930년대초 연극 〈동방이 밝아온다〉에 주연을 맡은 신불출은 이 연극의 마지막 대사를 자기식으로 바꾸어 대한독립을 고무했다는 이유로 종로경찰서 고등계에 연행되어 철야조사를 받았는데, 이 사건은 그뒤 수없이 되풀이된 연행·석방의 시작이었다. "다시는 서울에서 무대에 서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난 뒤, '사대문 밖'이라는 뜻의 극단 '문외(門外)'를 조직하고 주로 서울 외곽에서 세태풍자 연극을 공연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만담가로 더 유명해졌다. 이 시기의 대표적 만담으로는 〈곰보타령〉·〈엿줘라 타령〉·〈망둥이 세 마리〉 등이 있는데, 그 중〈망둥이 세 마리〉는 일본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풍자한 작품이다.
해방 후에는 조선영화동맹에 가담했다. 1946년 6월 11일 조선영화동맹과 일간 〈예술통신〉이 함께 주최한 '6·10만세운동기념 연예대회' 때 '실소사전(失笑辭典)'이라는 제목의 만담을 벌여 객석에 있는 우익청년 200명에게 폭행을 당하고 주최자인 조선영화동맹 서기장 추민과 함께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 제2호 위반으로 '체형 1년 혹은 벌금 2만 원'을 언도받기도 했다. 1947년 월북한 뒤, 6·25전쟁 때 문화선전대 책임자로 서울에서 선무방송을 했다.
1957년 만담가로는 이례적으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10월 노력 훈장을 받은 동시에 공로배우로 선출되었다. 1961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직속 '신불출만담연구소'를 설치하고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이 시기 북한의 조직적 문예정책과 통제사회의 실상을 풍자한 탓에 1962년 한설야 등이 '종파주의자', '복고주의적 반동분자'의 혐의로 숙청될 때 같은 혐의로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협동농장으로 추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평론으로 〈현하극단의 실정을 논하야〉(동아일보, 1932. 8. 28~31)·〈문단에 소(訴)함〉(동아일보, 1933. 2. 14~16)·〈극예술협회에 보내는 공개장〉(삼천리, 1937. 1) 등을 발표했다. 희곡으로는 토월회의 공연작품을 개작한 〈아리랑 반대편〉·〈아리랑〉 등 다수가 있으나 현전하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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