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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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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우 신교육은 1876년 개항 이후 한일합병까지 시기별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1883년 원산항에 개화파 관료와 그 지방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원산학사가 설립되기도 했으나, 아직 경서를 중심으로 한 구교육이 강하게 남아 있어 신교육의 보급이 확산되지는 않았다. 1880년대에는 조선정부측에서 새로운 관리양성을 위한 육영공원(1886)이나 통역관을 양성하는 영어학교·일어학교 등을 설립하는 정도였다. 민간 차원에서는 주로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위한 미션스쿨이 설립되었는데, 1885년 배재학당, 1886년 경신학교와 이화학당, 1887년 정신여학교 등은 신교육 도입 초기에 설립된 학교들이다.

이화학당

이화학당의 저학년생들

ⓒ Methodist Episcopal Church/wikipedia | Public Domain

그러나 이들 학교는 학생의 흥미와 창의력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신교육기관이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영어, 서양의 근대과학, 실용적인 기술 등을 교육과정에 도입한 점으로 보아 신교육운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계 학교의 교육목표는 건전한 신앙인이나 교양을 갖춘 도덕적 인간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서양의 전통적 교육요소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었다.

신교육의 소개 이후 교육 이념과 제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는 1894년에 이루어진 갑오개혁이었다.

갑오개혁을 통하여 종래 예조가 교육과 외교 업무를 함께 담당했던 것을 학무아문에서 교육행정업무를 전담하도록 했고, 학무아문에는 총무국, 성균관 및 상교서원(庠敎書院) 사무국, 중학교·대학교·기예학교·외국어학교 및 전문학교를 관장하는 전문학무국, 소학교·사범학교를 관장하는 보통학무국, 편집국, 회계국 등의 부서가 조직되었다. 초기 학무아문의 구상은 소학교·중학교·전문학교·대학교로 이어지는 근대적인 학제를 도입하려는 것이었고, 다음해인 1895년 2월 26일 고종의 '교육입국조서'를 통하여 유교 중심의 구교육체제를 탈피하려는 입장이 제시되었다.

이 시기의 교육개혁도 1880년대의 교육개념을 넘어서는 신교육을 지향했다기보다는 교육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실현하고 민족의 자립을 실현하려 했던 국민교육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으나, 1895년 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의 설립을 시작으로 관립소학교들이 세워지고 아동들에게 교육기회를 확대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와 함께 독립협회와 같은 민간단체에서도 일반 국민, 특히 아동과 여자교육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기회를 확대해야 한다는 계몽활동이 이루어졌고, 1900년대초 대한제국시대에는 개인·언론·학회를 중심으로 한 민간의 신교육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개인들이 전개한 신교육운동은 각종 사립학교의 설립과 교과용 도서 편찬, 그리고 신학문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또한 〈독립신문〉·〈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 언론기관은 신교육 보급에 관한 논설과 신식교육기관의 설립기사들을 게재함으로써 신교육에 관한 계몽활동에 주력했고, 기호흥학회·서북학회·대한자강회 등 학회들은 신학문을 소개하거나 새로운 교과서를 편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사립학교의 경우 대한제국 말기까지 5,000여 개가 세워졌는데, 설립자들은 관리·지주·상인·민간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나, 대체로 전통교육을 유지하면서 서양식의 과학과 실용지식을 혼합하는 동도서기(東道西器)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사립학교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신교육을 통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려는 의도가 보다 강했다.

교육과정에서 한문과·수신과와 같은 전통적인 교과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새로이 조선어가 중요시되는 한편 역사와 지리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과로서 인식되었다는 점과 정치·법률·경제와 같은 사회교과, 농업·상업·가정과 같은 실용교과, 천문·의학·동식물학·물리·화학·지질·광물·산술 등 자연과학 교과서들이 편찬되었던 것은 교과목상으로 신교육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08년 8월 '사립학교령'·'교과용도서검정규정' 등이 공포되면서 민족주의계와 그리스도교계 학교들은 쇠퇴했고, 1911년 '조선교육령'의 반포로 신교육은 식민지주의 교육으로 변질되었다.

일제 36년간을 통해 조선총독부는 식민통치를 위한 교육, 충량한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교육, 저급한 노동자를 양산하는 교육에 치중했고, 아동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존중하거나 근대적인 교육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무시되었다. 단지 선교사 J. E. 피셔(한국 이름은 皮時阿)가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 학생회지에 기고한 〈교육의 근본적 목적〉이라는 글에서 듀이와 킬패트릭의 교육사상을 소개했고, 오천석·김활란·장이욱·김여제·서은숙·노재명 등이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30년대까지 듀이 교육철학의 중심지였던 미국 콜롬비아대학에서 수학하는 등 부분적인 활동에 그쳤다.

8·15해방 이후 신교육운동은 이들 미국유학파를 중심으로 새교육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고, 듀이 교육철학의 소개, 새로운 학습지도법의 도입, 교육과정 개편, 향토학교운동 등 다양한 노력이 시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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