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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9. 5. 25., 키예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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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2. 10. 26, 미국 코네티컷 이스턴 |
국적 | 러시아/미국 |
요약
시코르스키는 항공기 설계의 선구자이며 헬리콥터의 성공적인 개발로 유명하다.
어릴 때부터 모형 비행기 실험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그는 1908년 유럽여행중 비행기제작 분야의 발명가들의 업적을 접했다. 1909년 헬리콥터 제작을 시작했으나 작동에 실패했고, 1910년에는 보다 큰 기관을 단 2번째 헬리콥터로 시험했으나 비행에 실패했다. 그는 당분간 고정된 날개를 가진 비행기의 설계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겨 사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19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 몇몇 동료들과 함께 시코르스키항공공학회사를 설립하여 S-38, S-40, S-42기를 생산해 운항했다. 1939년 VS-300 헬리콥터를 제작하여 이륙에 성공하고, 1941년 5월에 개량된 항공기로 1시간 32.4초의 체공시간으로 국제기록을 세웠다. 그의 삶은 사실상 라이트 형제로부터 우주탐사까지 인간이 행한 거의 모든 비행에 영향을 미쳤다.
교육과 초기경력
그의 아버지는 의사이자 심리학 교수였다.
그의 어머니도 의사였지만 직업적으로 일하지는 않았으며, 미술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생과 작품에 대한 큰 흥미를 가졌다. 그로 인해 그는 어릴 때부터 모형비행기 실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2세 때 고무줄을 이용해 공중으로 뜰 수 있는 작은 동력 헬리콥터를 만들었다. 1903년 직업장교가 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공학에 대한 흥미 때문에 1906년 병역을 포기했다. 파리에서 짧은 기간 동안 공학을 공부한 뒤 키예프공과대학에 입학했다.
그의 학업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지만, 그때까지 배운 추상과학과 고등수학이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학교를 떠나 그 자신의 작업장과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1908년 여름의 유럽 여행중 비행기제작 분야에서 서로 경쟁하던 라이트 형제와 유럽 발명가들의 업적과 접할 수 있었다. 키예프로 돌아온 뒤 그는 레오나르도가 제안했던 수평 회전날개를 이용한 '수직상승'으로 비행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1909년 1월 누이인 올가의 재정적 도움으로 더 많은 연구와 경량의 기관(機關)을 구입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갔다. 1909년 5월 키예프에 다시 돌아와 헬리콥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작동이 되지 않아 몇 가지 실용상의 문제점이 있음을 드러냈다. 보다 큰 기관을 가진 2번째 헬리콥터가 1910년 시험되었으나, 비행에 실패했다. 그는 그당시 기술·기관·재료의 수준과 무엇보다 자금 및 경험 부족상태에서는 헬리콥터 제작에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해 모든 조건이 층족될 수 있을 때까지 30년을 기다려야 했다.
당분간 고정된 날개를 가진 비행기 설계를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그의 첫번째 비행기인 S - 1 복엽기를 만들었으며, 그것은 1910년초에 시험되었다.
비록 15HP(마력)의 기관은 부적합한 것으로 입증되었으나, 보다 큰 기관을 이용해 재설계된 비행기 S - 2기로 그는 최초의 단거리 비행을 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비행기를 개선하고 그의 조종 경험이 추가되어 S - 3기, S - 4기, S - 5기가 신속하게 그 뒤를 이어 제작되었다. 결국 1911년 여름에는 50HP 기관의 S-5기로 공중에서 1시간 이상 머무르고, 450m 고도까지 올라가 작은 들판을 횡단하는 비행을 할 수 있었다. 이 성공으로 그는 국제조종사면허 번호 64를 획득했다. 뒤를 이은 S - 6 기종으로 러시아 육군에 항공기를 공급하는 주요 경쟁자가 되었다.
곧이어 그는 1913년까지 비행에 성공한 많은 현대 폭격기와 민영 수송기의 전신인 최초의 4발 비행기 '르 그랑'을 제작했다. 이것의 혁신적인 특징 중 하나는 조종사와 승객을 위해 승무원실과 객실을 완전히 밀폐시킨 것이다. 러시아 혁명과 독일 붕괴의 뒤를 이은 혼란의 시기 동안 유럽에서는 더 이상의 항공기 개발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미국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1919년 3월 뉴욕으로 이주했다.
미국에서의 연구
혼자 힘으로 전후 항공기사업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강사와 학교교사로 가난하게 몇 년을 보낸 뒤, 러시아 장교였던 몇몇 동료들과 함께 시코르스키항공공학회사를 설립했다.
그들은 롱아일랜드 루스벨트필드 근처 농장의 오래된 헛간에 공장을 세웠다. 그후 1928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1929년 유나이티드항공사에 소속된 이 회사는 코네티컷 브리지포트에 대규모 현대식 공장을 차렸으며, S - 38 쌍발 수륙양용기를 많이 생산했다. 1931년 최초의 S - 40기인 '아메리칸 클리퍼'는 현재 팬아메리칸항공사의 주요항로인 카리브 해와 남아메리카 주변의 우편 및 여객 항로를 개척했다.
1937년 여름 팬아메리칸항공사는 1913년 '르 그랑'의 후신이자 시코르스키가 제작한 기종의 마지막이며 최초의 4발기인 S - 42 클리퍼기로 태평양 및 대서양 횡단운항을 시작했다.
1930년대 후반 군용 및 민영 항공수송 요구의 변화는 대형 비행선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으며, 그는 초기에 선호했던 헬리콥터의 제작으로 전환했다. 다시 한번 그는 '극히 신빙성 없는 정보와 어떠한 조종경험도 없는……진보되고 선구적인 연구'에 열중했다. 그러나 이때는 1910년대에 부족했던 필수적인 공기역학(空氣力學) 이론과 제작기술을 이용할 수 있었다.
1939년초 그의 뜻대로 잘 훈련된 공학자들과 함께 VS- 300 헬리콥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새로운 방향을 가진 훌륭한 공학기술은 짧은 기간 동안 고무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 때 큰 만족을 얻었다"라고 회고했다. 1939년 9월 14일 VS-300은 설계자가 조종해 처음으로 이륙했다. 평생 동안 시코르스키는 항상 새로 설계된 항공기의 최초 시험비행을 직접 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는 1941년 5월 6일 개량된 항공기로 1시간 32.4초의 체공시간으로 국제기록을 세웠다.
그당시 그는 헬리콥터가 이후 30년 동안 놀랄 만큼 발전하리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군용공격무기로도 널리 사용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는 헬리콥터를 산업 및 항공무역에 유용한 도구로, 그러나 주로 화재·홍수·기근과 같은 자연재해로부터 사람을 구조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의 활동적이고 전문적인 삶은 사실상 라이트 형제로부터 우주탐사까지 인간이 행한 거의 모든 비행에 영향을 미쳤다.
1957년 자신의 회사 공학경영자직에서 물러났으나, 죽을 때까지 고문으로 계속 활동했다.
1924년에 결혼한 뒤 4남 1녀를 두었다. 과학과 공학에서 많은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과 유럽에 있는 주요 과학기술학회의 명예회원직을 지냈고 항공학의 최고 메달과 상을 받았다. 그 가운데 1942년 뉴욕 항공과학연구소의 실베이너스 앨버트 리드 상, 1948년 미국 대통령 유공증서, 1951년 다니엘 구겐하임 메달과 증서, 1954년 엘머 A. 스페리 상, 그리고 1971년 국가방위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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