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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48. 5. 3, 프랑스 프레쥐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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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36. 6. 20,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성직자·헌법 이론가.
그가 주장한 인민주권 개념은 프랑스의 부르주아지가 프랑스 혁명 초기의 몇 개월 동안 군주제와 귀족계급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데 지침이 되었다.
나중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한 쿠데타를 계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799).
프레쥐스의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나 소르본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며 교회에서 지위가 올라 1780년 총대리가 되었고, 1788년 샤르트르 교구의 상서국장(尙書局長)이 되었다. 그러나 귀족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더이상 출세할 수 없었다. 1788년 삼부회가 소집될 당시 이미 귀족정치 체제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삼부회의 조직에 대하여 공개적 논쟁이 계속되던 기간에 소책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e tiers état?〉(1789. 1)를 발행했다.
그는 이 책자에서 특권을 갖지 않은 제3신분을 프랑스 국민으로 규정하고, 이들만이 유일하게 새로운 헌법을 입안할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이 소책자로 굉장한 인기를 얻어 1789년 5월 5일 소집된 삼부회의의 제3신분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의 발의에 따라 제3신분회 대의원들은 스스로를 프랑스 국민을 위해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위임받은 국민의회로 선포했다(6. 17). 왕은 6월 23일 국민의회의 합법성을 부인했으나 그는 왕의 도전에 굳게 저항하도록 동료들을 설득했다.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뒤이은 몇 개월 동안 국민의회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왕의 특권을 제한하는 법령 등을 통과시켰다. 시에예스는 '능동적' 시민(선거권이 있는 사람)과 '수동적' 시민을 구분했는데, 이것이 재산소유에 따라 선거권을 확정하는 법령에 채택되어 부르주아지가 계속 권력을 장악하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교회의 십일조를 폐지하는 조처와 법률제정에 관한 제한적 거부권을 허용하는 조처를 막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이론가로서 명성을 누렸지만, 허영심과 어눌한 웅변술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1793년 1월에는 의원 대다수와 함께 왕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으나, 급진 민주주의자들인 자코뱅당이 1793년 6월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포정치를 시작하자 정치에서 물러났다. 후에 그는 이 기간중의 자기 행동에 대해 "나는 살고 있었다"(J'ai vécu)라는 반어적인 말로 함축성 있게 표현했다고 한다.
1795년에 6개월 동안 공안위원회에서 일하면서 팽창주의 외교정책을 옹호했고, 1795년의 공화국 헌법으로 구성된 500인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1795. 10), 1799년 5월에는 통치기구인 5인 총재정부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입법기구를 희생하더라도 행정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 조제프 푸셰, C. M. 드 탈레랑과 공모해 군사 쿠데타를 조직하는 데 협력하여 브뤼메르 18일(1799. 11. 9)에 총재정부를 전복시켰다. 다음날 시에예스, 보나파르트, 피에르 로제 뒤코 등 3인이 임시통령이 되었다.
그가 초안한 새 헌법은 행정부 내에 정교한 권력균형이 유지되도록 안배했으나 보나파르트는 재빨리 그 헌법을 수정해 자신을 제1통령 겸 프랑스의 최고 통치자로 만들었다. 그후 시에예스의 정치적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그는 원로원 의원으로 남아 있으면서 레지옹 도뇌르 2등훈장을 받았고(1804), 제국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1808). 1815년 그는 루이 18세의 왕정복고 이후 국왕 살해범으로 몰려 추방당했다.
브뤼셀에 머물다가 1830년 7월 샤를 10세가 폐위되자 파리로 돌아왔다. 글린던 G. 밴 듀슨이 쓴 〈시에예스 : 그의 생애와 민족주의 Sieyès : His Life and His Nationalism〉가 1932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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