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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
17세기 중엽 러시아인이 대규모로 유입해 들어오기 전 시베리아에는 여러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의 문화는 자연과 기후조건에의 적응형태에 따라 남부의 건조·반건조 스텝 지역, 중부의 넓은 삼림지역, 북부의 많은 하천과 호수를 포함한 영구동토지역 등 세 지역권으로 나눌 수 있다. 남부의 스텝 지역에서는 말과 양을 기르는 유목문화가, 중부의 삼림지대에서는 순록을 기르는 유목과 수렵·채취 문화가 발달했고, 그로부터 더 북쪽인 북극해와 오호츠크 해 연안에는 고래·해마·물개 등을 사냥하며 살아가는 어로문화가 발달했다.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다양한 민족구성만큼이나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
원주민 언어는 크게 야쿠트족과 시베리아타타르족을 비롯하여 남부 시베리아의 여러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투르크어족, 에벤크족·라무트족 등이 사용하는 만주퉁구스어족, 오스탸크족·보굴족 등이 사용하는 핀우고르어족, 부랴트족이 사용하는 몽골어족, 코랴크족·유카기르족·길랴크족 등이 사용하는 고(古)시베리아어족 등이 있다(투르크제족). 시베리아 원주민집단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단위는 지연 관계에 의한 부족집단이 아니라 혈연 관계에 의한 씨족집단이다.
같은 씨족의 구성원들이 2~3개의 서로 다른 부족에 속하는 예가 있으며, 그들은 혈연관계를 통해 일정한 의무를 갖는 씨족을 형성한다. 시베리아에서 농업이란 17세기 중엽 대규모 러시아인의 유입과 식민화가 있기 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서시베리아 평원(옴스크·톰스크·케메로보·노보시비르스크 주)과 비교적 입지조건이 좋은 하바로프스키·프리모르스키 지구 같은 곳에서만 사슴사육·육우·낙농 등이 행해지고 있다.
전통적 사회조직
유럽인들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전에 야쿠트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형성한 사회조직은 친족과 캠프 집단을 중심으로 한 원시적인 형태였다.
친족은 부계가 중심이 되었으나 친족용어와 무당의 양성적 성격 등에서 과거의 모계적 유형을 보여주는 여러 현상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서구적 의미에서의 사유재산 개념은 미약했으며, 각각의 캠프 집단이 관례에 의해 중요한 경제적 자원을 통제하면서 경제활동에 서로 협력했다. 경제적 측면과 육아에 있어서도 가족은 보다 큰 친족집단과 기능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경제활동에 참여하여 연장자로부터 기본적인 기술을 배웠다. 기술은 특별한 경기를 통해 반복적으로 습득되었으며, 그러한 경기들은 성년이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로 여겨졌다. 러시아인이 진출하기 전에 시베리아 원주민의 사회계층 분화는 미약했으나 러시아 정부가 행정적 편의를 위해 그들의 집단을 대표하는 특정인을 지정함으로써 이들이 상류층으로 성장하는 사회계층 분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와 별도로 야쿠트족과 같은 집단에서는 큰 순록 떼를 소유한 일부 계층이 상류층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시베리아 원주민에게 전문적으로 분업화된 직업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당과 대장장이이다. 이들은 특별한 소질을 가진 자들로서 기술자 밑에서 도제교육을 통해 양성되었다.
전통기술과 경제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소뿔, 매머드와 해마의 상아, 나무, 새의 깃털, 포유류 및 어류의 가죽 등을 주재료로 하여 여러 생활용품들을 만들었다.
총이 도입되기 전에 이들의 주무기였던 가시 돋친 창이나 활 등은 매머드나 해마의 상아와 나무로 만들었으며, 가죽으로는 옷, 보트, 옷가지나 물건을 담아 두는 가방을 만들었다. 보트는 천연염료를 이용하여 복잡한 모양의 색깔을 칠한 자작나무의 껍질로 만들기도 했다. 옷은 주로 들개의 가죽을 이용했는데, 일부지역에서는 물고기 가죽으로 어깨 망토와 방수처리된 장화를 만들었다.
철은 남부의 철산지 근처에 살고 있는 주민이나 러시아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공급받았다. 철광석으로부터 직접 철을 제련했는지의 여부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부 집단에는 총신·장신구·마구(馬具) 등을 생산하기 위한 작은 휴대용 철로(鐵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은 활송곳 방법, 즉 단단히 묶은 끈으로 구멍에 박힌 화살대를 돌림으로써 마찰에 의해 부싯깃에 불이 붙도록 하는 방법으로 얻었다.
요리용 그릇은 자신들이 금속으로 만들거나 러시아인들로부터 구입했으며, 밀가루 팬케이크 요리에는 철판을 이용했다.
순록 사냥은 생가죽 끈으로 만든 그물을 이용해서 순록을 잡은 다음 창으로 죽이거나, 스키를 탄 사냥꾼이 몸을 숨기고 있다가 돌진해서 잡는 원시적인 방법이 이용되었다. 마찬가지로 물고기를 잡는 데에도 생가죽이나 끈으로 만든 그물과 낚시를 이용했다. 교통수단으로는 툰드라 혹은 삼림환경에 맞는 해마의 상아나 금속활차를 단 개썰매 혹은 순록썰매, 스키, 눈신발 등이 이용되었으며, 여름철에는 가죽이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보트가 많이 이용되었다.
주거는 일반적으로 이동식이었는데,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가죽을 덮어 만들었다. 남부 시베리아 일부 집단은 솔과 떼를 덮은 반움집 형태의 집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해안가의 해양포유류 사냥꾼들은 고래의 갈비뼈로 지탱되는 반영구적인 집을 짓기도 했다.
종교관과 종교의식
시베리아 원주민의 종교는 그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무당은 자연세계와 초자연세계 간의 중개자로서 종교생활의 중심이며 또한 공동체의 의사, 상담역, 그리고 다른 집단의 공격으로부터 주술적 수단으로 공동체를 보호하는 방어자이기도 했다. 무당은 보통 사춘기 때 '내림'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서 되는데, 내림은 무당의 역할을 받아들여 수행하겠다는 동의를 통해서만 나을 수 있는 일종의 병이다. 이런 무당들은 양성(兩性)이라든지 보통 사람들보다 내장이 더 많다는 등의 특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무당이 수행하는 제례나 의식 이외에도 사냥이나 어로활동 혹은 사적인 생활에서 중대한 사건들에 관해 일반인이 개인적으로 수행하는 사적인 의식도 있다.
전통예술
시베리아 원주민은 기원신화·무속가요·속담·서사시 등 풍부한 민속문화와 함께 다양한 도형예술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지만, 무당이 사용하거나 춤출 때 박자를 맞추는 데 이용하는 작은 북(정확히 표현하면 탬버린의 일종) 이외에 나무와 금속으로 만든 구금(口琴), 뼈나 갈대로 만든 피리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극동의 일부 원주민들에게는 중국에서 전래된 양식의 현악기도 있다.
초기 러시아의 영향
러시아인들에 의한 탐험과 영토정복은 시베리아 원주민 경제에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
원주민들은 러시아인들과 모피교역을 하게 되었고, 총과 강철 덫, 기타 금속제 용구의 도입으로 사냥과 어로기술이 많이 발전했다. 또한 사냥도구 이외에도 담배·옷·소금·밀가루·보드카 등의 물품이 교역망을 통해 원주민들에게 공급되었다. 그러나 이무렵 유럽인의 영향은 제한적이었으므로 원주민의 자급자족경제의 기초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러시아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유럽의 교역상품을 단순히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측면은 별도로 하고서라도, 러시아 문화는 시베리아 원주민의 문화생활 전반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지역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알타이 고지와 바이칼 호 주변지역 등 일부 남부 시베리아에는 상당히 오래전에 형성된 러시아 농민사회가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추방된 종교적 이단자들의 후손으로서 '시비랴크'라고 불렸으며, 원주민과의 신체적·문화적 혼혈로 유럽러시아인과는 다른 문화와 외모를 가지고 원주민과 러시아인 사이의 중간 집단을 형성했다.
원주민은 이들로부터 농업기술을 배웠으며, 야쿠트족과 같은 일부 집단은 표면상으로는 그리스도교화되었고, 더러는 러시아 정교회가 후원하는 학교 교육을 받기도 했다. 시베리아에 끼친 러시아인의 영향에서 특히 고려해야 할 것은 원지에 정치범을 유형보내는 차르 정권의 정책이다. 이 정책은 러시아인이 원주민과 접촉하는 유형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대의 시베리아 주민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종합적인 시베리아 사회경제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나 처음 15년간은 주로 조사와 계획수립이 이루어졌으며, 실질적인 개발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기간중에 교육 및 보건 등에서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졌으나 유목 생활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920~30년대에는 많은 시베리아 원주민의 언어가 러시아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국민학교 교과서가 이들 언어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말까지 시베리아 주민의 생활양식에 큰 변화는 없었다.
1930년대초 소련의 다른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농업의 집단화가 이루어졌으나 시베리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말까지, 좀더 깊이 들어간 먼 지역에서는 1950년대초까지 거의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1979년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북부지방과 시베리아, 극동의 원주민 인구는 모두 26개 소수 민족집단에 15만 8,000명이었다(1970년에는 15만 1,000명). 그중 61.7%의 인구가 그들의 고유어를 사용하고 있으며(1970년에는 67.4%), 54%가 러시아어에 익숙하고, 5.2%는 그밖의 외국어를 쓸 줄 아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이들 소수 민족집단이 소멸해가고 있었으나 현재는 그 수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소비에트가 들어선 이후 스탈린에 의해 만들어진 '형식은 민족적, 내용은 사회주의적'이라는 슬로건 아래 시베리아 주민들의 민족의식을 북돋우려는 노력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서야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대전 후 전례없는 공업화가 이루어졌으며, 유럽권 러시아로부터 노동력의 대거 유입이 이루어졌다. 유럽권 러시아인들의 대규모 유입과 공업화, 도시화는 시베리아 주민의 생활양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근대적 교육을 받은 원주민들은 그들 선친의 직업을 물려받으려 하지 않았으며 또한 전통기술을 배우지도 못했다. 도시에서 교육받은 원주민들은 대개 그곳에서 의사·교사·관리가 되었다. 또한 순록을 기르고, 물고기를 잡는 기술수단은 좋아졌지만, 장비를 조작하는 숙련기술은 과거와 같이 가족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습득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원주민 문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원주민의 옷은 합성섬유보다 따뜻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사용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민족과의 결혼으로 친족체계의 전통적 유형에는 변화가 왔으나, 그 자체의 중요성은 유지되고 있다. 이상적으로 말해 시베리아 주민들의 독특한 문화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문화에 섞여 더욱 풍요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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