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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3. 2. 28, 맨체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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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4. 1. 11, 런던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정치가.
영국의 1등자작, 내무장관(1915~16, 1935~37), 외무장관(1931~35), 재무장관(1937~40), 대법관(1940~45)을 지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전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이끄는 정부의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에 관여했다.
1899년 변호사 자격을 얻은 시몬은 많은 사건을 맡았으며, 1906년에는 자유당원으로서 하원의원이 되었다.
그뒤 연이어 허버트 H. 애스퀴스 총리로부터 법무차관(1910. 10)·법무장관(1913. 10)·내무장관(1915. 5) 등으로 임명받았다. 1916년 1월 제1차 세계대전을 위한 징병제도의 도입에 반대하는 항의의 표시로 내무장관직을 사임했으나 1918년 11월까지 의회에 계속 남아 있었다. 1922년 11월 하원의원에 재선되었고, 1931년 11월 램지 맥도널드 연립정부의 외무장관이 되었다. 1927~30년에는 인도 정부에 대한 조사단의 책임자가 되어 그곳의 온건개혁을 권장했다.
1930년대 전반에 그는 자유국민당도 이끌었다. 이 당은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보호관세를 지지하는 보수당의 견해를 받아들이던 이전의 자유주의자들이 모여 이룬 단체였다. 그는 영국과 나치 독일이 화해하는 것을 지지했고, 1936년 이후부터는 유화적 정치가로 간주되었다. 시몬은 1935년 스탠리 볼드윈 정부 때 2번째의 내무장관으로, 1937년 5월 체임벌린 정부 때는 재무장관으로 임명받았다. 그뒤 그는 외교문제에 관한 내각 총책임자로 남았다.
그는 뮌헨에서 히틀러와 맺은 별 내용이 없는 영국-프랑스 협정을 지지했다(1938. 9. 30). 시몬은 1940년 5월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전시(戰時) 연립내각의 대법관으로 임명되었고 자작의 칭호를 받았다. 1952년 그의 자서전 〈회고 Retrospect〉가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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