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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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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40/50경
사망 1405. 9. 24(~1406. 1. 30), 부르고뉴 디종
국적 네덜란드

요약 네덜란드의 조각가.
Claus는 Claes, Klaas라고도 씀.

초기 네덜란드 조각에 큰 영향을 미친 조각의 대가이다.

세련미·섬세함·우아함을 특징으로 하는 당대의 지배적인 프랑스 양식을 뛰어넘어 매우 개성적이고 자연스러운 형태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만들었다. 디종에 있는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인 샤르트뢰즈드샹몰 예배당을 위하여 만든 3개의 작품이 특히 유명한데, 예배당 입구의 가운데 기둥에 새긴 조상(彫像)들과 회랑에 놓여 있는 6각형의 〈모세의 샘 Well of Moses〉,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의 묘비에 새긴 여러 개의 조상(프랑스 디종 미술관) 등이 그것이다.

클라우스 슬뤼테르의 작품들은 사실주의에 영성(靈性)과 웅장함을 결합시키고 있다.

그는 15세기 북부 유럽의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널리 영향을 주었다. 14세기 중엽에 출생한 그는 인적 사항에 대한 기록보다 작품 자체를 통해서 많이 알려졌다. 1379년경 브뤼셀에 있는 석공 길드의 명단에 올라 있는 클라에스 데 슬뤼테레 반 헤를람이 바로 그가 아닌가 추측된다. 브뤼셀 시 청사에서 떨어져나온 콘솔(코니스나 장식품을 받치는 까치발) 조각은 현재 시립박물관에 있는데, 이것이 그의 작품이든 아니든 간에 아무튼 여기에는 그의 주요한 성향이 나타나 있다고 생각된다. 부르고뉴 공국의 기록 문서에 따르면, 그는 1385년에 이 공국의 중심지인 디종에서 필리프의 신하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14세기 후반에 네덜란드의 통치자이자 프랑스의 섭정이었다. 그는 1383년 디종에 카르투지오회 수도원 샹몰을 세우고, 그 예배당을 슬뤼테르의 조각으로 장식하여 왕조의 영묘(靈墓)로 삼았다.

슬뤼테르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조각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모두 필리프를 위하여 만든 것이었다. 그중 2개의 작품은 아직도 샹몰에 있는데 공작 부부의 수호성인인 성 세례자 요한과 성녀 카타리나가 성모 마리아와 예수에게 이 부부를 소개하는 장면이 예배당 입구의 가운데 기둥에 새겨져 있다.

또 한 작품은 수도원 회랑에 있는 〈모세의 샘〉으로, 갈보리 언덕에서 그리스도(그리스도의 머리와 몸통 부분의 단편은 현재 디종의 고고학 박물관에 있음)의 수난에 관한 군상을 떠받치고 있었던 우물 지붕의 잔재이다. 그밖에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필리프의 무덤이 있는데, 이것은 한때 샹몰의 예배당에 있었지만 지금은 디종 미술관에 옮겨져 있다.

디종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슬뤼테르가 의뢰를 받아 만든 조각품에 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1389년 그는 장 드 마르빌의 뒤를 이어 필리프의 수석 조각가가 되었으며, 마르빌의 조수들을 브뤼셀에서 온 조각가들로 교체했다. 그해에 그는, 일찍이 1386년에 예배당 정문에 쓰기 위해 계획했던 조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는 입구 중앙에 있는 닫집이 파손된 것을 교체했으며 1391년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상 및 두 성인의 상을 완성했다. 1393년경 공작부인의 상이 완성되었으며, 필리프의 상도 그무렵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92년 파리에서 설화석고를 샀으며, 그 다음해에는 므앵쉬르예브르에서 필리프의 허랑방탕한 동생이며 당대의 가장 유명한 미술후원가이자, 베리 공국의 공작장의 유능한 조각가인 앙드레 본뵈의 작품을 감독했다. 1395년에는 네덜란드를 여행했으며 디낭과 말린에 가서 대리석을 구했다. 바로 그해에 예배당의 회랑에 놓여 있는 갈보리 군상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1396년 공작에게 의뢰받은 많은 일거리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카인 클라우스 데 웨르베를 비롯한 많은 조각가들을 브뤼셀에서 디종으로 불러들였다.

필리프의 무덤에서 건축과 관련된 부분은 1389년쯤 완성되었지만, 조각으로는 1404년 필리프가 죽을 때까지 슬픔에 잠긴 조상 2점만이 만들어졌을 뿐이었다. 필리프가 죽기 3주 전에 슬뤼테르는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평화를 지키고 노년기를 안전하게 보내기 위하여, 디종의 생테티엔 수도원에 기거할 장소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죽어서 그곳에 묻히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지내지 못한 것 같다. 필리프의 아들인 은 1404년 그의 아버지의 무덤을 4년 안으로 완성하도록 주문했지만, 슬뤼테르의 조카는 1410년에야 겨우 끝마쳤는데 결국 그것은 존의 무덤을 만들기 위한 모형으로 사용되었다(바닥 주위의 슬픔에 잠긴 조상의 상당수는 슬뤼테르의 작품의 모사품들인데, 이 두 무덤은 프랑스 혁명중에 해체되었다가 상당 부분이 1818~23년에 복구되었기 때문에 슬뤼테르의 기여도를 정확하게 입증하기란 어려운 일임).

슬뤼테르는 우아한 형태와 섬세하고 세련된 동작, 유연하게 떨어지는 드레이퍼리 등을 특징으로 하는, 당대의 지배적인 프랑스 양식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또한 양감처리에서도 본뵈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표현주의적인 표현을 뛰어넘었다. 슬뤼테르 작품의 웅장함은 그로부터 수십 년 후 등장하는 반 에이크 형제와 로베르트 캄핀 등의 플랑드르 회화나 자코포 델라 퀘르치아와 도나텔로 등의 이탈리아 조각에서나 비등한 것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샹몰 예배당의 입구는 현재 약간 손상되어 있다(성모 마리아의 상과 천사들의 상은 분실되었으며, 한때는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듯이 예수의 상이 분실되기도 함). 이 작품은 마르빌이 시작했지만 슬뤼테르가 다시 설계했는데, 그는 건축물보다 조상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조상을 건축물에서 약간 떼어 놓았으며, 출입구를 배경으로 필리프와 그의 아내가 경배하는 모습을 배치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정면 설계를 3폭짜리 회화와 같은 모습으로 변형시켜, 건물이 그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다. 튀어나온 차양과 불룩나온 초엽에 깊숙하게 새겨진 인물이나 휘감긴 드레이퍼리는 그의 역동적 자연주의를 돋보이게 한다. 이 작품은 규모가 매우 크고 균형잡힌 형태로 이루어진 거대하고 묵직한 작품이다.

6면으로 이루어진 〈모세의 샘〉은 전체가 하나의 '생명의 샘'을 상징하고 있으며, 책이나 두루마리 등을 가지고 있는 6명의 실물 크기 예언자들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꼭대기에 있었던 갈보리 군상은 없어졌다.

이 조상은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시계바늘과 반대 방향으로 다윗·예레미야·스가랴·다니엘·이사야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모세·다윗·예레미야 상은 1402년경 만들어졌음). 프랑스의 미술사가인 에밀 말(1862~1954)은 그 조상들이 들고 있는 두루마리에, 중세의 성사극(聖史劇) 〈빌라도의 심판 The Trial of Christ〉에서 이 6명의 예언자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가 죽게 된 것이라고 예언한 구절이 들어 있음을 밝혔다. 한때 코니스의 모서리에는 6명의 천사들이 그려져 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얼굴 바로 밑에 있으며, 성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스가랴는 연장자답게 예수의 뒤에 서서, 젊은 다니엘이 그의 예언을 열렬히 역설하고 있는 모습을 슬픈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다니엘의 또다른 쪽에는 다니엘의 정열적인 기질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사색에 잠겨 있는 이사야가 있다. 이러한 배치를 이용하여 슬뤼테르는 자연스러운 상호 균형을 나타내고 있다. 갈보리 군상 중 남아 있는 그리스도의 머리와 몸통 부분은 강렬한 힘이 절제되어 나타나 있어 압도적인 위엄을 느끼게 한다. 얼굴의 아래쪽은 좁고 야위었지만 근육의 긴장이 없이 평온한 반면에 미간은 찌푸러져 있어서 고통과 체념이 뒤섞여 있다.

〈모세의 샘〉은 원래 필리프의 화가인 장 말루엘이 채색한 위에 쾰른의 헤르만이 금박을 입혔다(예레미야의 상은 심지어 구리로 만든 안경을 썼는데, 1403년 이 안경의 대금을 지불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음). 이 조상들은 그러한 구도를 통해 건축물의 전체적 틀을 구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작의 웅대함을 통하여 전체적인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슬뤼테르의 현존 작품 중 가장 후기의 것은 호담공(豪膽公) 필리프의 무덤인데 이것은 디낭에서 가져온 검은 대리석으로 묘석 밑의 아케이드식 회랑만을 책임진 장 드 마르빌이 처음 의뢰했다.

각각의 높이가 약 41㎝쯤 되고 슬뤼테르가 설계했거나 직접 만든 40개의 조상들이 애도의 행렬을 이루고 있다. 그 조상들 가운데 3개는 분실되었고, 3개는 클리블랜드 미술관에 있으며 1개는 프랑스의 개인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 그것들은 슬뤼테르의 조카인 클라우스 데 웨르베와 후안 데 라 우에르타 및 다른 예술가들이 프랑스와 그밖에 지역에서 조상이 있는 묘를 만드는 데 모델로 이용되었다.

슬뤼테르는 애도 행렬을 고안하거나 그러한 배열을 구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조상들은 울고 있는 모습으로 각각 다르게 표현되었다. 그 슬픔을 숨김없이 나타내거나 억누르고 있는데, 모두 두꺼운 겉옷을 몸에 두르고 있으며 이따금 머리와 얼굴도 가리고 있어 슬픔을 꾹 참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부피가 큰 드레이퍼리는 우물 지붕 위의 모세 상에서 볼 수 있듯이 커다란 동작의 느낌을 전달해준다.

이 무덤의 조상들에서 슬뤼테르는 자연스러운 형태와 개성적인 표현의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한순간 우울하게 이 죄많은 세계를 생각하다가도 다음 순간 아름다운 자연에 기뻐한다거나, 기분이 아주 좋았다가도 어느새 슬피 운다거나 할 정도로 감정의 변화가 매우 심했던 시기의 변덕스러운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신주의자요 자연주의자였던 슬뤼테르는 잠재된 법칙들과 영원한 웅장함을 지닌 자연에 대한 인식을 조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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