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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365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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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408. 8. 22 |
국적 | 로마 |
요약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섭정(394~408)이며, 서부 로마 최후의 위대한 군사령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이민족을 상대로 한 전투에 여러 번 참여했는데 알라리크가 이끄는 침입자 서고트족과 발칸 반도 및 이탈리아에서 싸웠고, 406년에는 동고트족의 이탈리아 침략을 물리쳤다.
직업군인이 된 그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총애하는 조카딸 세레나와 결혼했다. 황제는 죽기 전에 그를 로마 서부의 황제가 될 아들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으로 임명했다. 401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호노리우스가 살고 있는 밀라노를 위협하자, 그는 402년에 고트족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405년 말 이교도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았다. 그들 그 대부분은 동고트족으로 피렌체를 공격했으나 스틸리코에게 패했다. 라다가이수스는 406년 8월에 처형당했으며 이 승리를 기념해 로마에 개선문이 세워졌다.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섭정(394~408)이며, 서부 로마 최후의 위대한 군사령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이민족을 상대로 한 전투에 여러 번 참여했는데 알라리크가 이끄는 침입자 서고트족과 발칸 반도 및 이탈리아에서 싸웠고, 406년에는 동고트족의 이탈리아 침략을 물리쳤다.
스틸리코는 로마인과 반달족의 혼혈아로 태어났다. 그는 직업군인이 되어 383년에 페르시아 왕 샤푸르 3세에게 사절로 파견되었고 그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총애하는 조카딸 세레나와 결혼했다. 그는 385년경에 근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393년 또는 그 전에 육군 총사령관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395년 이전에 스틸리코가 세운 군사적 업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389년에 이민족 침입자들의 처리에 대한 의견차이로 플라비우스 루피누스와는 서로 적이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죽기 전에 스틸리코를 로마 서부의 황제가 될 아들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으로 임명했으며, 로마 동부의 황제가 될 아들 아르카디우스의 후견인으로는 루피누스를 임명했다. 스틸리코는 경쟁자인 루피누스보다 군사적으로 훨씬 유리했다.
테오도시우스가 왕위 찬탈자 유게니우스를 진압하기 위해 소집한 군대가 테오도시우스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로마 서부에 집결해 스틸리코의 지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틸리코와 루피누스가 서로 싸우기 전, 모이시아 남부에 살면서 유게니우스 토벌 작전 때 많은 사상자를 낸 서고트족이 족장 알라리크의 지휘로 반란을 일으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스틸리코는 두 황제가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던 일리리쿰에 대한 로마 서부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이끌고 테살리아로 갔다.
그러나 그가 테살리아에서 알라리크와 막 싸우려 할 때 동부의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후견인 루피누스의 조언에 따라 스틸리코에게 그의 군대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스틸리코는 이 명령에 따랐고 그리하여 알라리크는 그리스로 침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된 군대는 395년 11월 27일 루피누스를 죽였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시인 클라우디아누스는 스틸리코를 찬양하는 시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는 시인이 죽은 404년까지의 당시 정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397년에 스틸리코는 또다른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갔지만 이번에도 역시 알라리크를 싸움에 끌어들이지 못하고 이탈리아로 철수했다. 같은 해 아프리카의 코메스(comes)인 길도가 로마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아프리카의 곡물을 실은 배가 로마로 항해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스틸리코는 재빨리 갈리아와 스페인에서 곡물을 수입하고 이듬해 길도의 형제인 마스케젤을 군대와 함께 아프리카로 보냈다.
마스케젤은 길도를 쉽사리 굴복시키고 그를 처형했다. 그러나 마스케젤도 그 직후 세상을 떠나, 스틸리코는 마스케젤이 경쟁자가 되지 못하도록 그를 암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398년 스틸리코의 딸 마리아는 호노리우스 황제와 결혼했고, 스틸리코는 400년 콘술(집정관)이 되었다.
401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침범해 호노리우스가 살고 있는 밀라노를 위협하자, 스틸리코는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라인 강 주변의 변경 지방과 브리튼 섬에 주둔해 있던 부대를 이탈리아로 불러들여 402년에 폴렌티아(지금의 이탈리아 브라 근처 폴렌초)에서 고트족과 싸웠다.
402년 4월 6일, 부활절 일요일에 벌어진 전투는 스틸리코의 불완전한 승리로 끝났지만 그는 고트족의 진영을 점령했다. 그후 알라리크는 에트루리아로 진군했지만 일련의 협상 끝에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403년 그는 다시 이탈리아에 들어와 베로나를 공격했다. 스틸리코는 또다시 그를 무찌르고 북쪽으로 도망치는 알라리크를 추격했다. 두 사람은 다시 합의하여 알라리크는 만신창이가 된 군대를 이끌고 도망치는 것을 허락받았다.
405년말에 이탈리아는 새로운 침입자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번에는 이교도 라다가이수스의 영도를 받는 게르만족이었는데 그 대부분은 동고트족이었다. 당시의 기록으로는 이들의 수가 수십 만 명에 이른다고 추산했지만 그런 숫자는 믿기 어렵다.
게르만족은 피렌체를 공격했지만 스틸리코의 반격에 밀려 피에솔레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피에솔레에서 스틸리코는 이들의 보급로를 끊고 무차별로 학살했다. 라다가이수스는 406년 8월 23일 처형당했으며 이 승리를 기념해 로마에 개선문이 세워졌다.
일리리쿰 병합 계획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스틸리코는 407년 마침내 일리리쿰 병합 작전에 나섰다(일리리아). 그는 동로마 제국의 모든 배가 이탈리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항구를 봉쇄하고, 호노리우스를 위해 에피루스를 지키라고 알라리크에게 지시하는 한편, 그 자신은 아드리아 해를 건널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알라리크가 죽었다는 허위 보고가 들어왔고, 이어 브리튼(브리타니아) 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는 또다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알라리크는 노리쿰(오스트리아 중부) 지방으로 진격해 자신을 고생시킨 데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그가 요구한 보상액이 컸지만(금 4,000파운드) 스틸리코는 강력히 반대하는 로마 원로원을 설득해 지불했다. 이무렵 황후 마리아는 이미 죽었고 408년초 호노리우스는 역시 스틸리코의 딸인 테르만티아와 결혼했다.
그러나 스틸리코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그가 아들 유케리우스를 황제 자리에 앉히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408년초에는 그의 군대가 불만을 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어서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스틸리코는 콘스탄티노플로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스틸리코가 아들을 동로마 황제 자리에 앉힐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궁정 관리인 올림피우스가 퍼뜨리자 틱티눔(파비아) 주둔 군대는 8월 13일에 그 지방 관리들을 거의 다 죽여버렸다.
스틸리코는 라벤나로 갔지만 호노리우스의 명령으로 감옥에 갇혔다. 그는 8월 22일에 참수당했으며 아들 유케리우스도 그 직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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