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스탈린주의의 지나친 월권행위가 한풀 꺾인 듯한 1934년말, 스탈린은 자신을 권좌에 올려준 공산당원들에 대한 새로운 정치 폭력전에 착수했는데, 그가 구실로 내세운 것은 동료이자 장차 정적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12월 1일 레닌그라드에서 암살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1956년 제20차 공산당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 당 제1서기가 스탈린 격하연설 도중 '스탈린 자신이 숙청을 단행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고 암시한 바 있다. 스탈린은 고위 공산당원들에 대한 여론 재판을 폭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1936년 8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재판정에 끌려나와 허위자백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총살당했으며, 1937년 1월과 1938년 3월 또다시 대규모의 재판이 벌어졌다. 1937년 6월에는 당시 군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인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와 그밖의 고위 장성들이 반역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처형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상이 소련 공산당과 소련 엘리트 전체를 길들이는 데 사용한 스탈린의 주요박해사건이다. 그는 반독립적인 고참 볼셰비키 당원들뿐 아니라 공산당의 많은 지도급 인사들, 군부의 지도자들, 산업 관리인들, 그리고 자신에게 철저히 순종한 정부의 고위 관리들까지도 숙청했다. 그밖의 희생자들 가운데는 소련 영내에 머물고 있던 외국 공산주의자들과 NKVD로 개칭된 정치경찰기구의 구성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술계·학계·법조계·외교관을 위시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엘리트들이 희생되었을 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스탈린의 정치적 희생자는 수천만 명으로 헤아려졌는데, 그의 주된 목적은 자기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정치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