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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를라티

다른 표기 언어 (Giuseppe) Domenico Scarla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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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85. 10. 26, 나폴리
사망 1757. 7. 23, 마드리드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작곡가로 555곡에 달하는 건반악기 소나타로 유명한데, 그의 건반 소나타는 하프시코드의 기술적, 음악적 가능성들을 확대시켰다.
유명한 성악음악 작곡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 때인 1703년 나폴리에서 초기 오페라인 〈일 주스티노>를 무대에 올렸다. 1714~19년 성베드로 성당 음악감독을 지냈고, 이 기간에 <암블레토>(1715)를 통해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로서 첫 계기를 마련했다. 1720년말경 리스본에서 포르투갈의 군주 후안 5세의 음악감독이자 공주 마리아 바르바라 드 브라간사의 음악선생이 되었다. 마리아 바르바라는 후견인으로 계속 남았고, 그의 대다수 하프시코드 소나타는 그녀를 위해 쓴 것이었다. 죽기 직전 소프라노와 현악기를 위한 <살베 레지나>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성악곡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곡이다.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

이탈리아의 작곡가이다.

ⓒ Domingo Antonio Velasco/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개요

특히 555곡에 달하는 건반악기 소나타로 유명한데, 그의 건반 소나타는 하프시코드의 기술적·음악적 가능성들을 확대시켰다.

초기생애와 성악작품

스카를라티는 유명한 성악 음악 작곡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아들로 바흐와 헨델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있어 초반 경력은 16세 때인 1703년 나폴리에서 초기 오페라들인 〈Ottavia restituita al trono〉·〈일 주스티노 Il Giustino〉를 무대에 올림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작품들의 대본과 음악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에도 연주되고 있다. 1705년 아버지는 스카를라티를 나폴리에서 베네치아로 보내 그곳의 유명한 선생이자 오페라 작곡가 겸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음악감독(안토니오 비발디도 이 자리에서 일한 바 있음)이었던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에게 배우도록 했다.

베네치아에서 스카를라티는 젊은 아일랜드인 토머스 로자인그레이브를 만났다.

로자인그레이브는 훗날 영국의 스카를라티 재단을 설립하여 수세기 동안 지속되도록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는 스카를라티의 하프시코드 연주에 대해 영국 음악학자 찰스 버니에게 말하기를 "마치 스카를라티가 1,000개의 손으로 그 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제껏 이렇게 감동을 주는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스카를라티는 자기보다 몇 달 먼저 태어난 헨델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이들은 스카를라티가 로마에 자리잡게 되고 헨델이 1709년 이탈리아를 떠나게 된 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지만 일생 동안 서로에 대해 애정과 찬사의 말을 주고받았다.

1709년 봄 로마에서 스카를라티는 그곳에 망명중이던 폴란드의 마리아 카치미라 여왕의 음악감독 겸 작곡가가 되어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1714년 여왕이 이탈리아를 떠날 때까지 오페라와 행사음악들을 작곡했는데, 대본이나 가사는 모두 여왕의 비서였던 카를로 시기스몬도 카페치가 썼다.

위대한 이탈리아 바로크 건축가들 가운데 최후를 장식했던 젊은 필리포 유바라가 대다수 그의 작품의 무대 장치를 맡았다. 현존하는 그림에서 나타나는 그 장대한 무대 전경은 팔라초 추카리에 있는 여왕의 조그만 극장을 웅장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당시 그가 쓴 음악 가운데 일부가 남아 있지만, 훗날 그가 하프시코드 소나타들로 얻은 영광이 없었다면 이것들은 오늘날 별로 관심을 끌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1713년경에는 이미 그는 교황청과의 관계를 확고히 하고 있었으며, 1714~19년 성베드로 성당 음악감독을 지냈다.

당시 씌어진 현존하는 작품들 가운데 10성부로 된 〈성모 애가 Stabat Mater〉만이 하프시코드 소나타들에 나타나는, 만년에 꽃핀 그의 재능을 단편적으로 보여줄 따름이다. 이 기간에 스카를라티는 〈암블레토 Ambleto〉(1715)를 통해 비로소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로서 첫 계기를 마련했다. 이 작품의 막간극인 〈라 드린디나 La Dirindina〉는 가사의 분방함 때문에 로마 공연 때 삭제되었다. 이어 계속 노력을 기울인 끝에 니콜라 포르포라와 함께 〈Berenice, regina di Egitto〉(1718)를 만들기도 했다.

한편 포르투갈 대사와 긴밀한 유대를 맺음으로써 보다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었으며, 그에 따라 1714년 그는 포르투갈 황태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칸타타를 작곡했다.

1719년 9월 스카를라티는 바티칸 궁정 음악감독 자리를 물러났는데, 기록에는 그가 영국으로 갔다고 되어있지만 영국을 방문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1720년말경(이보다 이전은 아님) 리스본에 있었으며, 9월 6일 리스본 궁정에서 그의 세레나타 〈계절의 싸움 Contesa delle Stagione〉이 연주되었는데 이 곡은 반 정도가 전해진다.

그는 화려하며 사치스러운 포르투갈의 군주 후안 5세의 음악감독이 되었으며, 왕의 동생인 돈 안토니오와 공주 마리아 바르바라 드 브라간사의 음악선생도 겸했다. 이 가운데 마리아 바르바라는 여후견인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되었는데, 스카를라티의 대다수 하프시코드 소나타는 그녀를 위해 쓴 것이었다. 교회 음악과 세레나데도 계속 작곡했지만 현존하는 작품들로 판단해볼 때 그 대다수는 두드러진 작품이 아닌 범작(凡作)들이다.

그러던 중 스카를라티의 삶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1725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1728년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43세의 나이에 로마의 처녀 마리아 카탈리나 젠틸리와 결혼했다. 그녀는 모두 5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1739년 세상을 떠났다. 1729년 스카를라티가 가르쳤던 마리아 바르바라가 훗날 페르디난드 6세로 즉위할 왕자와 결혼하게 되자 스카를라티 부부도 함께 스페인으로 갔다.

스페인에서의 후기생애와 건반음악

그는 여생을 스페인에서 보냈다.

최초의 세비야 시절부터 그는 스페인 민속 음악을 들었으며, 찰스 버니가 이야기하듯이 '짐꾼, 노새몰이꾼, 일반 백성들의 노래'를 듣고 곡으로 옮기기도 했다. 1733년 이후에는 마드리드 왕실, 라 그랑하, 엘 에스코리알, 아랑후에스 궁 근처에 거주했다. 이곳에서 그는 과거의 인연을 많이 끊었고 그만큼 자유로워져 비약적으로 하프시코드 소나타의 양식적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성악 음악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중단했고, 친구인 파리넬리의 호사스런 오페라 제작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파리넬리는 뛰어난 노래솜씨로 반미치광이인 펠리페 5세의 마음을 끌어 스페인 궁정에서 더할 나위 없는 위세와 힘을 발휘했던 카스트라토 가수였음).

오늘날 스카를라티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생애와 성격을 가장 충실히 전하고 있는 현존하는 기록은 〈쳄발로 연습곡 Essercizi per gravicembalo〉(1738)을 시작으로 하여 이후 계속 이어진 일련의 하프시코드 소나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쳄발로 연습곡〉은 이전에 그에게 산티아고 기사단작위를 주었던 포르투갈의 후견인 후안 5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에게 헌정한 곡이다. 이 일련의 하프시코드 소나타들에는 마리아 바르바라를 위해 1742, 1749년에 만든 필사본도 포함된다. 마리아 바르바라는 1746년 스페인 여왕이 되었으며, 스페인 궁정의 음악활동은 여전히 파리넬리 주도 아래 이전보다 더욱 호사스럽게 되었다. 스카를라티가 마지막으로 남긴 일련의 하프시코드 소나타는 1752~57년 여왕을 위해 쓴 하프시코드 소나타들의 필사본으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품활동을 계속했음을 말해준다.

"이 곡들은 궁정의 우아함을 전하는 것에서 야성적인 것과 달콤한 도시풍에서 거칠고 격렬한 것까지 다양하다.

즐거움의 뒤에는 비극의 기초가 깔려 있어서 더욱 더 강렬한 느낌이다. 명상과 우수의 순간들은 오페라적인 외향적 정열의 파도에 압도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생의 일부를 살았던 스페인에서의 삶을 매우 특이하게 표현했다. 소나타로 창조해낸 스카를라티의 소우주에는 어김없이 스페인 사람의 삶과 민속음악과 춤이 있다. 어떤 스페인 작곡가도 심지어는 20세기의 마누엘 드 파야조차도 외국인 스카를라티만큼 스페인의 본질을 완벽하게 표현하지는 못했다.

스카를라티는 캐스터네츠 소리, 기타의 소박한 연주, 잔잔하게 치는 북의 울림, 집시의 비탄에 찬 쓰라린 울음, 시골 악단의 왁자지껄한 즐거움, 특히 스페인 춤의 강인한 긴장을 포착했다."(R. 커크패트릭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Domenico Scarlatti〉에서)

또한 그의 음악에는 스페인의 궁정 축제들의 모습과 국가 의식용 관악기와 북, 궁정 사냥용 호른과 오보에 소리, 불꽃놀이와 포병의 사격 소리, 아랑후에스에서 벌어진 여름 뱃놀이 동안 타구스 강 위로 떠다니는 왕의 유람선에서 연주된 음악소리 등의 기운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느슨하게 짜여진 인상적 표제음악만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이러한 특성들은 스카를라티가 16세기 교회음악의 대가들로부터 배운 엄격함과 한데 섞여 있고, 단순한 하프시코드 기교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어 순수 음악 언어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계속해서 소나타만을 작곡했던 말년의 5년 동안 스카를라티는 그의 전체 삶을 보상받았고,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살았으며, 알찬 결실을 맺었다."(〈도메니코 스카를라티〉에서)

스카를라티의 하프시코드 음악은 일관성 있게 발전했는데, 특히 단순한 2부분 형식으로 된 춤곡을 주제 장식이나 조성 영역의 확대를 통해 확장시킨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건반악기 기교상의 커다란 개혁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과감한 불협화음과 비전통적 성부 진행, 먼조로의 조바꿈 등이 그러하다. 초기 소나타에서는 빠른 악장들이 지배적이었지만 중기에는 느린 악장들을 보다 많이 사용했을 뿐 아니라 서정성이 두드러졌으며, 한편 후기 소나타는 보다 선적이며 집약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다.

1749년 여왕에게 바친 소나타를 시작으로 그의 소나타들은 점차 빠르고 느린 악장이 짝을 이루거나 아니면 또 하나의 빠른 악장에 의해 보완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따라 여러 악장을 하나의 단위로 지각하는 개념이 생겨났다.

후기 소나타 중 400개 정도는 짝으로 구성되었고, 적어도 12개의 소나타는 3개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소나타의 이러한 짜임새는 그다지 널리 인식되지 않고 있고, 따라서 이것들의 진정한 위상을 파악하는 데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 후기 소나타는 대부분 전통적인 지중해 지역의 손건반 1단으로 된 하프시코드를 위해 작곡했다.

삼나무로 만든 이 악기는 5옥타브의 확대된 음역과 8피트 스톱(8feet stop:'스톱'이란 오르간에서는 파이프 열을 의미하지만 하프시코드에서는 현의 열을 말하며, '8피트'란 가장 짧은 현의 길이가 8피트라는 뜻에서 유래) 2개를 갖추었다. 마리아 바르바라 여왕은 3개의 주요왕궁, 즉 마드리드의 부엔 레티로, 아랑후에스, 엘 에스코리알에 이 악기를 배치했다. 스카를라티는 이처럼 단순하고 기법적으로 한계가 있는 악기로도 다양하고 대조적인 음향과 짜임새를 만들어냈으며, 피아노에서 쇼팽과 리스트에 비교될 만한 수준으로 하프시코드 어법을 끌어올렸다.

죽기 직전 스카를라티는 또다시 성악 음악으로 돌아와 소프라노와 현악기를 위한 〈살베 레지나 Salve Regina〉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성악곡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곡이며, 보존될 가치가 있는 곡 가운데 하나이다.

스카를라티에 대한 평가

스카를라티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는 조숙함을 지녔으면서 실제로는 뒤늦게 성숙기를 맞았음을 알 수 있다. 생의 전반을 성악 음악에 몰두했지만 이들 성악 음악은 아버지 알렉산드르 스카를라티의 영향으로부터 그다지 독립하지 못한 작품들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조국 이탈리아를 떠난 이후 그는 거의 모든 소나타들에서 전례 없던 독특한 자기 양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 사실 스카를라티 소나타의 대다수는 생애 후반에 작곡된 것이다.

스카를라티가 남긴 말은 〈쳄발로 연습곡〉 서문과 헌사, 1752년 알바 공에게 보낸 서신에 약간 남아 있고, 그밖에 몇몇 법률서류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의 필사 악보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12개를 넘지 못하며, 자필 하프시코드 소나타 악보는 하나도 없다.

도밍고 안토니오 데 벨라스코가 그린 스카를라티 초상화는 1912년까지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다가 현재 알피아르사 항구의 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로 그의 초기 소나타들을 인쇄한 18세기 영국 악보들과 그것을 복사한 대륙의 복사물을 제외하면 당시 스카를라티의 건반 음악은 그와 직접 관련된 집단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따라서 이탈리아의 후배 작곡가들이나 C. P. E.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이탈리아 작곡가 가운데 무치오 클레멘티만은 예외적으로 그의 작품을 출판했으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음).

그의 하프시코드 소나타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06년부터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알레산드로 롱고가 그의 악보를 출판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스카를라티 판본이나 다른 판본들은 심각한 결함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1953년이 되어서야 그의 하프시코드 음악의 양식적 특성과 전체적 윤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랠프 커크패트릭 판본과 케네스 길버트 판본만이 연대순으로 작품을 배열하고 작품들을 짝을 맞춰 배열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카를라티의 하프시코드 작품에 대한 온전한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의 양식이 18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것 가운데 하나임을 밝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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