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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88. 1. 29, 스톡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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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72. 3. 29, 런던 |
국적 | 스웨덴 |
요약 젊을 때는 과학과 철학에 몰두했으며, 장년 이후에는 성서를 해석하고 자신의 경험을 영적 세계와 관련짓는 일에 헌신했다. 그가 죽은 직후 스베덴보리학회가 설립되었으며, 이 학회는 ‘새 예루살렘 교회’ 또는 ‘스베덴보리주의자들’이라고도 불리는 새교회의 핵심을 이루었다. 웁살라대학교를 졸업한 뒤 과학과 철학의 여러 문제들, 즉 우주론, 입자철학, 수학, 인간의 감각을 통한 지각 등에 대한 논문과 저서를 펴냈는데, 대표적인 것이 <자연 사물의 원리>, <영혼 세계의 질서>다. 1744년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았으며, 이후 그는 그때까지 해오던 자연과학 연구를 그만두었다. 남은 생애 동안 그는 성서를 해석하고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영적 세계와 관련짓는 일에 몰두했다. 그의 저승체험 때문에 영매자 또는 신비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영적 세계를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기술했으며, 정확한 논리로 신학을 연구함으로써 평생 과학적·철학적 탐구자의 태도를 유지했다.
개요
성서를 하느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해석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가 죽은 직후 헌신적인 추종자들은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스베덴보리 학회를 세웠으며, 이 학회는 '새 예루살렘 교회' 또는 '스베덴보리주의자들'이라고도 불리는 새교회의 핵심을 이루었다.
초기생애와 활동
스톡홀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예스퍼 스베덴보리는 스웨덴의 유명한 성직자, 궁정신부, 웁살라대학교의 신학교수였고, 후에는 스카라의 주교가 되었다.
그의 가문은 1719년 귀족 서열에 오르면서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1709년 웁살라대학교를 졸업한 뒤 5년을 외국에서 보냈다. 어릴 때부터 수학과 자연과학을 좋아한 그는 그것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네덜란드·프랑스·독일을 찾아다니면서 새로운 과학을 대표하는 여러 학자들을 만났으며 기계를 조작하는 구체적인 기술들을 배웠다. 바로 이 시기에 기계 발명과 관련한 그의 천재적인 재능이 활짝 피어났으며, 아울러 그의 사색은 달을 관측하여 지구의 경도(經度)를 발견하는 방법, 부두를 건설하는 방법, 심지어 잠수함과 비행기 발명을 위한 가설적인 제안을 하는 데까지 이를 정도로 광범위했다.
1715년 스웨덴으로 돌아와 스웨덴 역사상 최초의 과학 간행물 〈Daedalus Hyperboreus〉를 발간하여 자신의 연구계획, 발견사실, 당시 스웨덴 최고의 발명가 크리스토퍼 풀헴의 발명품들에 대한 수많은 보고서를 기고했다.
왕 카를 12세는 젊은 과학자 스베덴보리를 왕립 광산부(鑛山部) 특별 사정관으로 임명하여 풀헴의 보조자로 삼았다. 그후 30년 동안 스웨덴 광공업 발전과 개선에 이바지했다. 당시 그는 여러 해 동안 과학과 철학의 여러 문제들, 이를테면 우주론, 입자철학(粒子哲學), 수학, 인간의 감각을 통한 지각 등에 대한 보고서와 논문을 펴냈고, 때때로 라틴어로 시를 썼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출판되었다.
1718년에는 스웨덴어로 최초의 대수학(代數學) 책을 펴냈고, 1721년에는 화학과 물리학에 관한 책을 펴냈다.
스베덴보리의 자연철학
1721~22년 2번째 해외여행을 하면서 자연철학과 화학에 대한 2권의 라틴어 저서를 출판했고, 그후 거의 10년이 넘도록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1733년 3번째 유럽 여행을 시작했을 때 10년이 넘는 이 기간 동안 관리로서의 일상적인 업무뿐만 아니라 독서와 사색에 있어서도 충실하게 보냈음이 드러났다. 그러한 것이 밑거름이 되어 1734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철학적이며 논리적인 작업 Opera Philosophica et Mineralia〉을 출판했다. 이 책은 3권으로 이루어졌는데, 제1권 〈자연 사물의 원리 Principia Rerum Naturalium〉에는 그의 원숙한 자연철학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그는 귀납적인 논증을 사용하여 현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과 비슷한 여러 결론에 도달했다. 물질은 무한히 나눌 수 있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은 끊임없이 소용돌이 운동을 하며, 운동을 하는 더 작은 입자들이 그 안에 들어 있다고 했다. 이것은 핵과 그 주변을 도는 전자로 표현되는 현대 원자 개념과 매우 비슷하다. 그가 태양계 행성들의 형성에 대해 내놓은 가설은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이론(星雲理論 : 태양과 행성들이 동일한 하나의 성운에서 유래한다는 이론)의 전조가 되었다.
'영혼의 왕국'에 대한 연구
그는 1734년 〈자연 사물의 원리〉와 무한자(神)에 관한 소책자를 출판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1735년 아버지를 여읜 그는 다음해에 사정관 일을 휴직하고 여행 허가를 받아 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를 방문했다. 암스테르담에서 2권으로 된 방대한 분량의 새로운 책 〈영혼 세계의 질서 Oeconomia Regni Animalis〉(1740~41)를 출판했고, 1740년 11월에 스톡홀롬으로 돌아왔다. 〈영혼 세계의 질서〉는 스베덴보리의 과학 연구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이전에 피조물의 '영혼'을 순수한 운동에서 찾으려고 했던 그는 이번에는 사람의 영혼을 이해하고 이를 그 자체의 왕국, 즉 사람의 신체에서 찾으려고 했다.
피와 두뇌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면서 인체 해부학과 생리학을 철저히 연구했으나 사람의 몸 자체를 연구 주제로 삼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1734년에 감각 자체에 비해 영혼이 불멸성을 지닌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했는데 이제 그 계획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영혼이 피의 가장 내적 생명으로서 두뇌, 즉 구체적으로 피질 세포에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그의 연구방법은 주로 현미경 관찰과 시험관에서 얻은 사실을 종합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대단한 열정과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신 작용이 이루어지는 곳을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 이바지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의 해부학 저서들은 당시 과학계로부터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19세기에 몇몇 학자들이 그의 책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과학 수준이 그 책의 내용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영혼 세계의 질서〉를 출판한 뒤에는 잇따라 요약집과 소논문을 써서 그 당시까지 해온 심리학 연구를 매듭지었다. 이 가운데 일부는 그가 1744~45년에 출판한 〈영혼의 세계 Regnum Animale〉(3권, 원래는 17권을 계획했음) 가운데 실려 있다.
종교적 위기
그는 고통스런 종교적 위기를 겪으면서 해부학 연구를 마무리했고, 그러는 가운데 〈꿈의 일기 Journal of Dreams〉(1743~44)라는 특이한 글을 남겼다.
이 글은 본래 1743년 7월에 시작한 여행의 일지로 쓴 것인데, 사소한 여행 이야기들 중간 중간에 몇 해 전부터 꾸어온 꿈들, 특히 1744년 3~10월의 밤에 겪은 영적 체험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했다. 이중 일부는 성(性)에 관한 노골적인 내용이어서 1859년 책이 출판되었을 때 수많은 경건한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주로 성적 충동이 아니라 지적 자만심, 즉 위대한 과학자로 인정받고자 하는 자신의 열렬한 야망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1744년 4월 7일 그는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았으며 자만심과 자신을 괴롭혀온 악한 영들의 유혹에서 벗어나 잠시 평안을 누렸다. 말년에 친구들에게 한 말에 따르면 1745년 4월 그리스도가 놀랍게도 환상으로 나타나 세속 학문을 포기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후부터 그는 그때까지 해오던 자연과학 연구를 마무리하지 않은 채 그만두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
남은 긴 생애 동안 그는 성서를 해석하고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영(靈) 및 천사들의 세계와 관련짓는 일에 몰두했다.
1749~71년에 30권가량의 책을 썼는데,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으며 중요한 것은 익명으로 썼다. 이 가운데 〈천상의 비밀 Arcana Coelestia〉(8권, 1749~56)은 〈창세기〉·〈출애굽기〉의 영적인 의미를 설명했으며, 〈요한의 묵시록 해설 Apocalypsis Explicata〉(4권, 1785~89)은 〈요한의 묵시록〉에 대한 주석이다.
또한 〈천상의 놀라운 세계와 지옥에 대해서 De Coelo et ejus Mirabilibus et de Inferno〉(1758)는 그의 신학 저서로는 가장 잘 알려진 책일 것이다. 83세에 쓴 마지막 저서 〈참된 그리스도교 Vera Christiana Religio〉(1771)에는 그의 신학사상을 매우 분명하게 요약해놓았다. 그는 자신이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하느님이 주신 환상과 소명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했으며, 영적인 감각이 열려서 마치 물질세계에서처럼 또렷한 의식으로 영적 세계에 접근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자신이 연속 집필한 많은 주석과 신학 저서는 진리와 이성의 새로운 종교시대를 위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주장했으며, 바로 이 하느님의 새로운 계시가 재림의 참뜻이라고 보았다. 그의 저승체험 때문에 '영매자'(靈媒者) 또는 신비주의자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영적 세계를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기술했으며, 정확한 논리로 신학을 연구함으로써 평생 과학적·철학적 탐구자의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모든 피조물 안의 나누어지지 않는 무한한 힘과 생명이 하느님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신학에서 하느님은 본질(essentia)과 존재(esse) 모두에서 절대적인 통일을 이루며, 성부·성자·성령은 하느님의 본질적인 속성들, 즉 사랑·지혜·활동의 삼위일체를 나타내고, 이러한 하느님의 삼위일체는 인간 안에서 영혼·육체·정신의 삼위일체로 재현된다고 했다. 그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서 나왔고 그 사랑과 지혜가 구체화된 형식이자 결과이며, 따라서 피조물은 물질의 평면 위에서 영적 실재들에 '상응'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창조의 참된 질서는 인간이 자유 의지를 오용함으로써 훼손되었고, 사람이 하느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함으로써 악이 계속해서 세상에 들어왔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이 물질적이고 만질 수 있는 인간의 형태로 세상에 들어왔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신적 존재였으나 타락한 인류를 하느님과 가깝게 하기 위해 마리아에게서 육체를 얻고 태어나 인간성의 모든 측면을 지니게 되었다.
예수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모든 시험을 물리쳤고, 하느님 말씀의 진리대로 완전하게 살았으며, 그럼으로써 마리아에게서 받은 모든 인간적 속성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영혼의 신적 구현으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스베덴보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힘을 통해 인류가 하느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가 모든 시험과 악을 이겼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와 비슷하게 영적·육체적 면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정통 삼위일체 교리의 삼위격론(三位格論 : 한 하느님이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세 위격으로 계시되었다는 교리)을 배척했다. 그에 따르면, 삼위일체는 원래 한 인격이었는데 성부는 신 존재의 기원 자체이고 성자는 그 신적 영혼의 인간적인 구현이며, 성령은 예수 또는 신적 인간의 지속적인 활동이다.
스베덴보리는 또한 정통 신앙의 구원 개념도 배척했다.
그는 인류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으로 보았다. 악한 사람들의 영혼이 모인 지옥은 사람들의 정신을 사로잡아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자유를 파괴하려고 애쓴다. 예수는 친히 악한 영들의 시험을 받았으나 이에 철저히 저항함으로써 그들의 세력을 무너뜨렸으며, 이렇게 해서 완전해진 인간의 차원에 신적 존재가 들어와서 지옥과 인류 사이에 영원하고 무한하며 강력한 장벽이 형성되었다. 이리하여 인류는 지옥의 강력한 속박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게 되며 진리를 알고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또한 인간의 구원은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데 달렸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광범위한 주석과 신학 저서에서 성서를 영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 사이의 '상응'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려 했다. 또 성서에 나오는 일상적인 역사 문제를 다룬 내용들이 상징적으로 전달된 영적 진리라고 보았으며, 상세하고도 방대한 분량의 주석과 해설서를 통해서 그 열쇠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1772년 런던에서 죽었으며, 그곳 스웨덴 교회 뜰에 묻혔다. 그의 유해는 1908년 스웨덴 정부의 요청으로 웁살라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영향
스베덴보리는 설교자로는 활동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방대한 라틴어 저서들만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1780년대에 최초로 스베덴보리 학회가 생겼고, 1980년대말 런던에 다양한 새 예루살렘 교회 조직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독립회중이 생겼다. 그의 영향은 그 직계 제자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았으며, 오노레 드 발자크, 샤를 보들레르, 랠프 왈도 에머슨,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등의 많은 뛰어난 작가들이 주로 스베덴보리의 환상과 종교사상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신학 저서들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고 지금도 계속 판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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