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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은 이따금 덴마크, 스웨덴, 신성 로마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으로부터 배상·반환 요구를 받아야만 했다. 이 지역의 역사는 독일인 집단과 덴마크인 집단이 섞여 있어 경계 다툼과 주권분쟁의 연속이었으나 최근에는 화해상태이다. 19세기에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때문에 생긴 덴마크와 프로이센 간의 장기분쟁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지역은 오랫동안 덴마크의 일부였으며, 현재는 슐레스비히 북단 만 덴마크에 속해 있다.
12세기에 슐레스비히는 공작령이 되었으며, 1864년까지 분쟁 없이 덴마크와의 공동영지로 남아 있었다. 홀슈타인은 좀더 독립적으로 발전했고, 수세기 동안 직할영지로 덴마크 왕의 통치를 받았지만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로 남아 있었다. 1815년 이후에 홀슈타인은 지금의 독일로 통합되었다.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에 거주하는 독일어와 덴마크어를 쓰는 각 소수민족의 권리, 덴마크 왕족의 계승권, 덴마크의 이권 등은 1840년경에 덴마크와 프로이센, 후에는 덴마크·프로이센·오스트리아 사이에 일어난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당시 슐레스비히 북부에는 덴마크인, 남부에는 독일인, 북부 도시와 중부에는 두 인종이 혼합되어 있었다. 홀슈타인의 주민은 거의 독일인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독일의 국민의식을 일깨웠다.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사이에 역사적으로 이어졌던 정치적 결속을 통해 이 두 지역을 통일된 독일에 속하는 하나의 지방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슐레스비히 북부의 덴마크인들 사이에서 반대운동이 전개되어 1838년에는 덴마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덴마크의 자유주의자들은 슐레스비히가 수세기 동안 덴마크에 속했으므로, 독일과 덴마크 사이의 국경선은 오랫동안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의 경계선으로 표시되었던 아이더 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덴마크의 민족주의자들은 슐레스비히가 덴마크로 통합되고, 그 과정에서 홀슈타인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열망했다. 반대로 독일민족주의자들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사이의 결합을 확고히 하고, 그 과정에서 슐레스비히가 덴마크로부터 분리되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다툼은 1848년 3월에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대부분 구성하는 독일인으로 하여금 덴마크로부터의 독립 및 독일 연방과의 긴밀한 연합을 옹호하며 공공연한 폭동을 일으키게 했다.
이 폭동은 프로이센에서 파견한 군대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들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으로부터 덴마크 병력을 몰아냈다. 덴마크와 프로이센 간의 이 전쟁은 3년간(1848~50) 지속되었으며, 열강들이 1852년의 런던 회의 결과를 프로이센이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여 끝이 났다.
이 평화협정에 의해 독일연방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덴마크에 돌려주었다. 그 대신 덴마크는 1852년 런던 의정서에서 맺은 프로이센과의 협정에서 자매영지인 홀슈타인처럼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와 밀접하게 하기 위해 속박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1863년에 자유당 정부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9세가 덴마크와 슐레스비히 간의 새로운 협정에 서명하도록 설복시켰다. 따라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1852년 의정서의 지지자로서 중재가 자유로웠다. 계속되는 덴마크 전쟁(1864)에서 덴마크 군대의 저항력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의 2차례 단기전과 10월에 열린 빈 조약에 의해 힘을 잃게 되어, 크리스티안 9세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게 내주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새로운 영토를 얻기 위해 서로 싸웠으며, 1866년의 7주 전쟁(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결과 슐레스비히 북부의 덴마크어를 쓰는 다수 집단이 프로이센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불만의 소지를 만들었다. 1871년 독일제국 형성 후에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문제는 슐레스비히 북부에 대한 독일과 덴마크 간의 분쟁으로 좁혀졌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전쟁을 종결시켰던 프라하 조약(1866)은 북부 슐레스비히가 이 지역 주민 과반수의 자유선거를 통해 덴마크와 재결합되어야 한다고 제안했으나, 1878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이 조항을 취소하는 데 동의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뒤인 1920년에 북부 슐레스비히의 북쪽과 남쪽 지역에서 분리선거가 있었으며, 이 선거로 각기의 주민들은 덴마크나 독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 북부 슐레스비히의 북쪽 지역에서는 70%가 덴마크와 통합되는 것을 선택한 반면, 남쪽에서는 80%가 독일에 남는 것을 택했다.
이때 결정된 슐레스비히에서의 덴마크와 독일 간의 경계선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더이상 분쟁은 없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독일지역은 서독의 주로 편입되었다(→ 아이더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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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역사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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