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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
사적 제307호.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 의하면 백제 법왕이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오합사라고 불렀으나 신라 문성왕(839~859) 때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이 가람을 크게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성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는 적마가 나타나 밤낮으로 울면서 절 주위를 맴돌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은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지금까지 절터만 남아 있다. 1968, 1974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금당·삼천불전지·회랑·중문 등의 건물지가 밝혀졌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의 소조불두와 백제·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와당류가 출토되었다.
현재 중요문화재로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제19호), 동서 일렬로 배치된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과 보령 성주사지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 성주사지 동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성주사지 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국보(1962.12.20 지정). 전체 높이 455cm, 비신 높이 263cm, 너비 155cm, 두께 43cm. 현재 귀부의 머리와 몸체부분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나 비신과 이수를 갖춘 완전한 형태의 비석이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신라 헌덕왕 때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이 성주사에 머물다가 입적한 지 2년 뒤에 부도를 세웠다고 하므로 이 탑비는 890년(진성여왕 4)에 부도와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최치원이 찬한 것으로 사산비명의 하나이며 글씨는 해서체로 최인곤이 썼다. 이수는 앙련이 받치고 있으며 4면에 구름과 용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고, 앞면 중앙에 있는 제액은 마멸이 심하여 해독하기 어렵다. 이 탑비는 신라 석비 가운데 가장 크며 조각솜씨도 뛰어날 뿐 아니라 신라사회제도와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보물 제47호. 높이 400cm. 이 3기의 석탑은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3층석탑으로 세부표현에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같은 양식을 보여준다.
〈사적기〉에 의하면 3기의 3층석탑은 3세불인 정광불·약사불·가섭불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석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고, 갑석의 윗면은 약간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 호형과 각형으로 된 2단 굄이 있다.
상대석도 마찬가지로 각 면마다 우주와 탱주를 조각했으며 비스듬히 경사진 갑석 밑에는 부연이 있고, 그 윗면에는 2단의 굄이 있으나 탑신과 갑석 사이에 별석의 받침대가 삽입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는 각각 다른 돌로 구성되었는데,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특히 1층 옥신의 앞면과 뒷면에는 자물쇠 장식이 있는 문비가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비교적 완만하게 내려오다가 처마 끝부분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
상륜부는 파손이 심하여 현재 방형의 노반만 남아 있다. 1971년 이 탑을 해체·수리했을 때 1층 탑신 윗면에 있었던 사각형의 사리장치는 이미 도굴당해 없어진 상태였다.
성주사지소조삼천불상군
〈사적기〉에 따르면 이 삼천불상은 비로자나불과 함께 신라 문성왕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삼천불은 과거·현재·미래의 각 천불을 의미하며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 대부분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1974년 11월 동국대학교 박물관 팀이 삼천불전지를 발굴·조사하면서 그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소조불로 대량 조성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형태는 거의 없고, 대부분 머리부분만 남아 있으며 불상의 양식도 다양하다. 대체로 양감이 풍부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신라 불상과 탄력성이 적고 균형이나 비례가 맞지 않는 다소 형식화된 고려 불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고려 불상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신라·고려 시대에 걸쳐 다양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소조불상이라는 재료면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삼천불사상을 배경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불교사상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
보물 제19호. 높이 660cm. 이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으로 층수만 다를 뿐 각부의 세부표현이나 양식 등은 3기의 3층석탑과 거의 유사하다. 지대석 위에 하대석이 놓여 있는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하대갑석의 윗면은 경사가 급하며 가운데에 3단 굄이 있다. 상대석은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조각되었으며, 갑석 밑에 부연이 있고 윗면에는 3단 굄 위에 별석을 끼워넣었다. 이와 같이 탑신과 기단 갑석 사이에 별개의 굄을 삽입하는 것은 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석탑 형식이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만 표현되었고, 옥개받침은 4단으로 처마 끝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갔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1층 탑신 밑의 별석받침이나 4단의 옥개받침, 옥개석의 끝부분이 약간 반전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1971년 해체 수리공사 때 1층 탑신 윗면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유물은 없고 사리공의 석재 뚜껑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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