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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6. 9. 3, 미국 보스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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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4. 4. 14, 시카고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건축가.
미국 근대건축의 정신적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초기 마천루 건축 미학의 기초를 다졌다.
100여 개가 넘는 그의 작품은 당크마르 애들러와 동업하여(1879~95) 완성한 것인데, 대표작은 시카고에 있는 오디토리움 빌딩(1866~89), 버펄로에 있는 개런티 빌딩(지금의 프루덴셜 빌딩, 1894~95),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웨인라이트 빌딩(1890~91) 등이 있다. 설리번의 사무소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6년간 훈련을 받았다. 설리번은 1895년부터 독립하여 시카고에 있는 슐레징거 마이어 백화점(지금의 카슨피리스콧사 건물, 1899~1904) 등을 설계했다.
그의 자서전은 죽기 얼마 전에 출판되었다.
설리번은 건축 개혁의 대변자이자 역사적 절충주의의 반대자였으며, 창조적 개인으로서의 건축가 상을 재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의 설계는 장식이 풍부한 점이 특징이다. 그는 건축에서 이룬 업적뿐 아니라 저서로도 유명한데, 주관적·은유적인 내용을 갖는 그의 책들은 뚜렷한 주의주장이나 계획을 내세우기보다는 건축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으며 기계적인 예술이론이 지닌 위험성을 경고했다.
설리번 사상은 조각가 호레이쇼 그리노와 평론가 랠프 월도 애머슨 등 19세기 중반 2명의 미국인이 쓴 책과, 영국의 자연주의자 찰스 다윈의 저서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유기적 성장이론을 비롯한 다윈의 진화론 관계 저술은 유럽의 건축저술가들에게, 그리고 설리번의 생각에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건축가 세자르 드니 달리는 시카고의 한 건축 잡지에 재수록된 글에서 "모든 건축 양식은……인간 사회의 지적·윤리적인 힘의 산물이며……자연히 특정 문명의 표현물이 되었다……한 세대에 의한 한 양식의 선택……따라서 그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다른 것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그릇된 원리이다"라고 밝혔다.
같은 맥락으로 동시대의 독일의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는 "양식이란 예술 대상을 그것이 생겨난 상황과 발전과정에 일치시키는 것이다"라고 썼다. 양식의 본질에 대한 이같은 물음을 통해 설리번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자신의 금언을 만들었으나, 그 스스로 설계는 반드시 기능을 기계적으로 나타낸 시각표현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설리번은 건축이 특수한 기능과 그 구조적 기반을 표현함과 아울러 환경에서 진화하고 환경을 표현해야 한다고 믿었다. 설리번은 건축과 문명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생각한 최초의 미국 건축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마천루는 설리번의 저서와 작업에서 중심이 되는 내용이며, 그의 생각이 가장 간결한 것도 바로 이 주제에 관해서였다. 시카고에 있는 로스차일드 상점, 트뢰셔 빌딩과 같은 마천루 전단계의 상업용 건물은 정면을 의식적으로 명확히 드러내 개방하고 있다.
이러한 단순화는 "단일한 근원적 사고나 자극이 똑같은 정신으로 전체 매스와 각 세부에 스며든다"는 이념을 나타낸 웨인라이트·개런티 빌딩 같은 '마천루' 건물에도 그대로 옮겨졌다. 그의 설계의 빼어난 명확성은 당대 건축가들이 그의 개념을 부분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상당 부분 그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그는 고층건물 설계에서 형태는 기능을 따라야 하며 건물 기능이 변하지 않는 한 형태도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가 시카고에 지으려 했던 가장 극적인 마천루 설계인 '우애의 신전'(Fraternity Temple:1891)은 세워지지 않았다.
이 기획은 과감한 스텝백을 적용한 대칭구조로 솟아오르는 듯한 35층의 중앙 타워가 돋보이는 것이었다.
설리번은 평활한 표면과 입방체 형태를 사용한 만큼이나 장식에서도 혁명적이었다. 그의 장식은 역사적 선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기하학과 양식화된 자연의 형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비록 그의 초기 장식은 고딕 복고 양식이나 앤 여왕시대 양식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할지라도, 20세기로의 전환기에 그가 이룩한 작품의 절정을 이룬 성숙한 장식들은 이론의 여지없이 그 자신의 것이었다.
그것은 특이하게 보이지만 유럽의 아르 누보 장식과는 연관 없이 따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단단한 듯하지만 물 흐르는 듯하고, 밀집되어 있지만 풍부한 이러한 장식은 건축이 사회에 봉사하고 사회를 표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감흥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설리번의 생각을 되새기게 하는 것이었다.
설리번의 초기생애
루이스 설리번은 무용 교사인 아버지 패트릭과 어머니 아드리엔 프랑수아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 출신의 아버지와 스위스 태생의 어머니는 각각 1847, 1850년에 미국에 이민왔으며 1852년에 결혼했다. 큰아들 앨버트 월터는 1854년에 태어났다. 설리번은 보스턴 지역의 공립학교에 다녔으며, 여름이면 사우스레딩 근처에 있는 할아버지 농장에서 지냈다. 1869년 부모가 시카고로 이사하자 그는 할아버지 집에, 나중에는 이웃집에 살면서 보스턴으로 통학했다.
1872년 9월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 들어갔다. 1865년 문을 연 이 학교는 미국에서 처음 건축과를 설치한 학교였다. 성급한 학생이었던 설리번은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하거나 어느 한 건축가의 견습생으로 들어갈 작정으로 그해말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뒤 뉴욕 시로 가서 자신의 생각을 리처드 모리스 헌트와 의논했다. 헌트는 그무렵 이름을 날리던 건축가였으며 또한 에콜 데 보자르에서 건축을 공부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 헌트는 필라델피아의 퍼니스·휴잇의 설계사무소에서 일할 것을 권유했다.
설리번은 1873년 경제공황으로 일거리가 줄어들 때까지 몇 달 동안 그 회사에서 일하며 지냈다. 그해 11월 시카고로 가서 곧 시카고파 양식을 발전시킨 중요 인물인 윌리엄 르 배런 제니 사무소에 취직했으며, 감독자인 존 에들먼과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공부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못해 1874년 7월 유럽으로 떠났다. 비록 나중에 그가 침착하지 못하고 별난 학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 어려운 보자르 입학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피렌체·로마로 짧은 여행도 떠났다.
양 볼에 수염을 기른 낭만적 젊은이였던 그는 맵시 있는 복장을 좋아했고 파리에서 보낸 1년 동안 건축가 에밀 보드르메르의 아틀리에에서 일했다.
설리번의 중기생애
1875년 6월 설리번은 시카고로 돌아와 몇몇 사무소를 전전하면서 제도사로 잠깐씩 일했다.
이 가운데에는 갓 설립된 존스턴과 에들먼의 사무소도 있었다. 바로 존 에들먼이 미래의 동업자인 당크마르 애들러에게 설리번을 소개하는 중요한 만남을 주선했다. 1879년 설리번은 애들러의 사무소에 들어갔고 1881년 5월 24세의 나이에 애들러 설리번 건축설계사무소의 동업자가 되었다. 이들은 14년을 함께 일하면서 100여 개의 건물을 만들어냈는데, 이 건물들 가운데 대다수가 미국 건축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설계자로서 설리번의 탁월함은 애들러의 사업수완과 고객을 다루는 솜씨, 음향 등의 여러 기술에 관한 지식으로 더욱 빛을 발했다.
일찍이 애들러는 1861년에 시카고에 와서 제도사로 일했으며 남북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1871년에는 에드워드 벌링과 성공적인 동업관계를 맺어 1879년까지 작업했다. 애들러는 단독으로 시카고에 있는 센트럴 뮤직 홀(1879)을 설계했는데, 이 극장은 뒤에 애들러 설리번 사무소에서 설계한 여러 극장의 원형이 되었다. 애들러는 음향학의 전문가였으며 말년에는 건축의 기술적 측면과 건축 법규에 관한 책을 썼다.
애들러와 설리번은 실제로는 주택 설계를 많이 했으나 예술사에 업적을 남긴 것은 상업용 건물설계였다. 이들 건물 대부분은 시카고에 있는데, 이는 1880년대 시카고의 상업팽창으로 말미암아 많은 일을 맡은 결과였다.
그러나 이들의 초기 작업은 오래도록 관심을 끄는 건물을 만들지는 못했다. 설리번의 원숙함을 나타내는 초기 건물은 1886년 위촉받은 시카고의 오디토리움 빌딩이다. 이 건물은 3,982석을 갖춘 오페라 전용 오디토리움을 U자형 호텔과 사무실로 특색 있게 조합하여 감싼 것이었다.
1889년 12월에 완성된 이 건물은 17층 타워가 있으며 화강암·석회암으로 지은 10층 건물이다. 우아한 외부 아케이드는 겉보기에 매우 단순하고 장식이 거의 없으며, H.H.리처드슨 설계로 얼마 전 시카고에 완공된 마셜 필드 백화점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내부는 부조와 색깔 있는 스텐슬 무늬로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다. 내부의 모든 요소는 장식 설계에 매우 뛰어난 설리번의 능력을 보여준다.
오디토리움 내부는 더욱 호화로우며 금박을 입힌 석회벽과 수많은 전구가 이채로운데, 1967년 원래 대로 복원되었다. 극장에 어울리는 현란한 장식은 역사적 절충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놀랄 만큼 뛰어난 이 오디토리움의 음향 설계는 애들러가 담당했는데 그는 건물의 구조와 기계설비도 아울러 책임졌다. 오디토리움의 본체가 완공되기도 전에 애들러와 설리번은 당시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사무실 자리였던 오디토리움 타워의 16층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젊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리번의 제자로서 6년간을 보낸 곳도 바로 이 사무실이었다.
라이트는 1893년 설리번과 말다툼한 뒤 사무실을 떠났고, 1914년까지 이들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라이트는 자신의 작품과 개념 형성은 설리번의 영향을 받았음을 늘 인식하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10층짜리 웨인라이트 빌딩은 설리번이 설계한 가장 중요한 마천루이다. 이 건물은 외벽이 견고한 조적식 내력벽 구조인 오디토리움 빌딩과 달리 시카고에서 1883~85년 윌리엄 르 배런 제니가 발전시킨 개념에 따라 철골 구조로 되어 있다(골조식 건물). 제니를 비롯한 여러 건축가들은 고층건물의 높이를 눈에 띄게 표현할 수 없었으며 때때로 부적절한 역사적 복고양식을 쓰기도 했다.
설리번은 이러한 문제점을 잘 다루어 '당당하고 힘차게 솟아오르는' 통일성을 지닌 설계를 했다. 건물의 2개 층을 기단으로 삼아 그위에 수직 요소를 강조했으며, 수평적인 요소는 뒤로 후퇴시켜 최소화했다. 강조된 수직적 리듬의 끄트머리는 깊이 파서 장식한 프리즈(小壁)와 돌출 코니스(처마돌림띠)로 마감했다.
버펄로에 있는 16층의 개런티 빌딩은 역시 애들러와 공동설계한 것으로, 외벽이 붉은 벽돌이 아닌 장식적인 테라코타로 덮여 있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웨인라이트 빌딩과 비슷하다. 두 빌딩 모두 그들의 작품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에 속한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콜럼버스 국제박람회는 설리번에게 극도의 실망을 안겨주었다.
건축가가 상상력을 발휘해 국제행사를 설계할 기회는 어설프게 고전 건축이 채택됨으로써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온통 흰색으로 덮인 박람회 건물들의 장관은 대중에게 크나큰 성공이었다. 애들러와 설리번이 설계한 '교통관'은 외롭게 서 있었고 마치 항의하듯 가지각색 강렬한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황금의 문'이라 불린 알록달록하게 채색한 거대한 아치형 입구가 있는 길고 나지막한 아케이드 건물이었다.
모든 관람객이 박람회 건물의 신로마식 장대함에 감명받은 것은 아니었다. 파리 장식예술연합을 대표해 파견된 앙드레 부예는 교통관의 독창성에 찬사를 보냈다. 나아가 그는 황금의 문 석고 모형과 고층건물 사진을 비롯한 설리번 작품 소규모 전시회를 파리에서 열도록 기획했다. 이 전시회는 나중에 러시아와 핀란드에서도 열렸다.
이처럼 유럽에서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설리번의 비통함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그는 콜럼버스 박람회를 미국 중서부에서 발전중인 진보적인 건축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경력과 건축이론을 밝힌 〈개념의 자서전 Autobiography of an Idea〉(1924)의 끝부분에서 이 행사를 평하여 "이 국제박람회가 빚어낸 피해는 적어도 50년간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미국적 사고의 정수에 깊숙이 침투해버렸다"라고 했다.
설리번의 후기생애
1893년에 시작된 미국 경제침체로 설계 주문은 크게 줄어 설리번과 애들러도 어려움을 겪었다.
크레인엘리베이터회사가 보수가 좋은 디자이너와 대리인 자리를 제의했기 때문에, 애들러는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서도 1895년에 건축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설리번은 애들러가 배신했다고 비난하며 심하게 반발했다. 애들러는 새로운 직업에 불만을 느껴 6개월 뒤 건축사무소로 돌아오기로 결정했으나 설리번이 다시 동업하자는 제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오디토리움 빌딩의 다른 곳에 자기 사무실을 열어 1900년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작업을 했다.
자존심 강하고 낙관적인 설리번은 1895년부터 혼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건축사 업무의 모든 과정을 다루기에는 부적합했다. 새로운 일거리는 드문드문 들어왔다. 일찍이 1889년 18세 때 고용되었던 조지 그랜트 엘름슬리는 성실한 직원으로 남아 있었지만 설리번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거만했고 불필요하게 단호했다…… 좋은 건축주에게 필요 없는 조언을 하기 일쑤였다…… 자신의 이상을 굽히지도, 의도하는 바에 꼭 맞는 핵심적인 구상을 바꾸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많은 일거리를 놓쳤다." 그가 마지막 30년 동안 받은 20건의 주문만 보아도 그의 사업이 거의 파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설리번이 의뢰받은 몇 안 되는 주요작업 중의 하나는 시카고에 있는 슐레징거 마이어 백화점으로, 1904년부터 카슨피리스콧사가 사용한 건물이다.
1899~1904년에 전체 기획 중 서로 연결되어 있는 2개의 단위건물이 세워졌고 3번째 건물은 1906년에 대체로 그의 원래 설계를 따라 다니엘 H. 버넘이 만들었다. 사무용 건물이었던 웨인라이트 빌딩과 개런티 빌딩에서 수직성을 강조한 것과는 반대로 이 백화점 건물에서는 수평성을 강조했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직4각형의 '시카고 창'인데, 이것은 고정된 큰 창 양쪽에 여닫을 수 있는 새시 창이 붙어 있다.
상부층의 우아한 단순성은 1·2층의 사치스런 장식과 대조를 이룬다. 이 두 층의 창문은 화려한 액자처럼 건축장식을 하여 쇼윈도처럼 꾸몄다. 이러한 주철 건축장식은 기하학적이고 양식화된 꽃무늬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대부분은 엘름슬리가 설리번의 장식을 본떠 설계한 것 같다. 사실이야 어떻든 이 건물의 장식, 특히 주출입구 위의 장식은 건축장식 설계자로서 설리번이 이룩한 작품의 진수를 나타내는 것이다.
시카고에 있는 그의 게이지 빌딩 외벽을 둘러싸는 듯한 장식판만이 이 장식적 풍부함에 견줄 수 있다. 1895년 이후 설리번의 작품에서는 더욱 강렬한 조소적 풍부함과 한층 높아진 주관성이 나타난다. 뉴욕에 있는 12층짜리 베이어드 빌딩(지금의 컨딕트 빌딩)은 주형을 뜬 테라코타와 주철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애들러와 함께 일하던 번창했던 시기가 일종의 짜증나는 기억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설리번은 점차 외롭고 까다로워졌다.
일리노이센트럴철도회사에서 성공한 임원으로 역시 시카고에 살던 형 앨버트와도 멀어졌다. 중년이 된 설리번은 은둔이나 마찬가지인 생활을 하며 책을 쓰거나 미시시피 주 오션스프링스에 있는 겨울 오두막집에 들르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1899년 마거릿 데이비스 해터보와의 결혼도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1906년에 별거에 들어가 1917년 자식 하나 두지 못한 채 이혼했다. 수입이 줄어듦에 따라 경비를 줄이기 위해 점차 값싼 호텔로 옮겨다녔다.
1909년 설계주문 감소로 절망적인 곤궁에 빠져 마침내 자신의 책들과 생활집기를 팔아야 했다. 아마도 이에 맞먹을 손실은 바로 그해 20년간 조수로 일하던 엘름슬리가 떠난 것으로, 그는 1903년에 설리번 밑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는 건축가 윌리엄 그레이 퍼슬과 함께 일하기 위해 미니애폴리스로 떠났다.
말년에 이룬 작업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미네소타 오워토나에 있는 내셔널파머스뱅크 건물을 시작으로 중서부 소도시에 세운 7개의 소규모 은행이었다.
이 작품은 기묘한 특성을 지녔는데 이 특이한 디자인은 주로 엘름슬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양측면에 커다란 아치 창문이 뚫린 단순한 입방체 모양이며, 안전한 느낌을 주는 붉은색 사암과 벽돌로 이루어진 벽은 색깔 있는 모자이크와 윤이 나는 청록색 테라코타 띠로 장식되어 있다. 이 건물의 단순한 형태와 장식의 균형은 많은 찬사를 받았다.
정연한 건물 내부는 외부와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두 아치 창문의 맞은편에 반원형 벽이 있다. 또다른 흥미를 끄는 은행 설계는 아이오와 주 그리넬에 있는 머천츠내셔널뱅크(1914)이다. 오워토나의 은행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간결한 형태이지만 상상력을 발휘한 복잡한 장식으로 변화를 주고 있다. 정면은 출입구 상부에 있는 원형 창문의 호화로운 장식 구조물로 치장되어 있다.
설리번의 마지막 작품은 시카고에 있는 크라우스 음악 상점(1922) 정면설계였다.
설리번은 1918년 오디토리움 타워에 있던 사무실을 조그만 2층 사무실로 옮겨야 했고, 1920년에는 사무실이라곤 가질 수도 없었으며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1개의 침실만 있는 곳에서 살아야 했다. 비록 그의 작업장소는 시카고테라코타사 사무실에 있는 책상 1개였지만, 이곳에서 〈자서전 Autobiography〉 저술작업과 〈능력 있는 사람의 철학에 따른 건축장식 시스템 A System of Architectural Ornament According with a Philosophy of Man's Powers〉(1924)의 도판 19개를 끝마치는 등 2가지 중요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2권의 간행본을 받은 1주일 뒤에 죽었고, 시카고에 있는 그레이슬랜드 묘지의 부모 무덤 곁, 자신이 설계했던 게티와 라이어슨의 묘가 보이는 자리에 묻혔다. 뒤에 친구들이 수수한 묘비를 만들어주었다. 훨씬 뒤인 1946년에 미국건축가협회(AIA)는 그에게 금메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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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루이스 헨리 설리번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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