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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호

다른 표기 언어 徐丙浩

요약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호는 송암(松巖). 한국 최초의 목사 7인 중 1명인 서경조 목사의 차남으로 한국인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1901년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공부하고 1905년 경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후 고향에서 부친이 설립한 해서제일학교, 평양대성학교, 경신학교 등에서 교사로 일했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8년 난징[南京] 진링대학[金陵大學] 철학과를 졸업했다.

이 때에 상하이[上海]와 난징 일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지사들과 접촉을 가지게 된 서병호는 김규식·여운형·선우혁·신석우·장덕수 등과 함께 상하이 영국 조계(租界)에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강력한 추진'을 목적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당수로 취임하였다. 이 단체에서는 기관지 〈신한청년보 新韓靑年報〉를 발간하여 교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독립운동의 선봉부대로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제헌의정원 내무위원으로 활약하였고, 국내에 잠입하여 요원간의 연락과 독립자금 모금에 전력하였다. 1921년 훈춘사건(琿春事件)이 터지자 7월 간도지방의 〈국민대표회〉 기성회를 조직하고 위원이 되었다. 1923년 상하이에서 남화학원을 설립하였고 1933년에는 상하이에 소재하던 인성학교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상해한인기독교청년회 이사장, 한교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해방 후 1947년 8월 귀국하여 새문안교회 시무장로, 중앙기독교청년회 이사, 경신학교 이사로 일했으며 1950년 경신학교 이사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전시대책위원장으로 일했다. 전쟁 후인 1953년 기독교학교연합회를 조직하여 구호사업에 힘썼고 라이트하우스, 농아협회 이사장으로 일했으며 제14대 경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 경신학교에서 정년 퇴직한 뒤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 부회장을 지냈다. 1968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80년과 1990년에 각각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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