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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7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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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28. 9. 22 |
국적 | 줄루족 |
요약
아프리카 남부의 줄루족 족장(1816~28)이며 줄루 제국의 창건자.
Chaka, Tshaka라고도 씀.
개요
군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남부 전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초기생애와 승계
그는 줄루족 족장인 센장가코나와, 이웃 랑게니족 족장의 딸이었으나 고아로 자란, 난디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부모는 원래 같은 씨족 출신이었으므로 이들의 결혼은 줄루족 관습을 어긴 행위였고 대를 이어 샤카에게까지 이런 오명이 씌워졌다. 이들 부부는 샤카가 6세 때 갈라섰다. 샤카는 어머니를 따라 랑게니 마을로 갔고 그곳에서 어머니를 경멸하는 사람들 틈에서 아버지 없이 소년기를 보냈다. 1802년 랑게니 사람들에게 쫓겨난 난디는 결국 힘센 부족인 음테트와족의 방계에 속하는 들레트셰니족으로 피신했다. 샤카가 23세가 되었을 때 음테트와족의 족장 딩기스와요는 그를 전사로서 싸울 의무를 지닌 성인집단에 넣었다.
그뒤 6년 동안 그는 음테트와의 제국 전사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1816년 샤카의 아버지 센장가코나가 죽자 딩기스와요는 샤카를 병역에서 면제해주고 줄루족을 이끌도록 고향으로 보냈다. 당시 줄루족은 1,500명도 채 안 되었고 백(白)움폴로지 강가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800개가 넘는 동(東)은구니반투 씨족들 가운데 가장 작은 부족에 속했으나 샤카가 돌아오자 거대한 씨족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부터 철권통치를 폈으며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즉각 죽음으로써 보상했다.
군대 개편
그가 첫번째로 손댄 일은 군대 개편이었다(전략). 다른 모든 씨족들과 마찬가지로 줄루족도 소가죽 방패와 가느다란 투창을 무기로 쓰고 있었다.
전투라고 해야 열세인 쪽이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현명하게 포기해버리기 때문에 전투는 짧은 시간에 벌어지고 비교적 피를 적게 흘리는 충돌에 불과했다. 샤카는 우선 창날이 길고 손잡이가 짧아 꿰찌를 수 있는 투창으로 전사들을 재무장시킴으로써 가까이서 적과 싸우게끔 만들었다.
그다음에는 나이에 따라 연대조직을 편성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마을에서 진을 쳤고, 방패에 새긴 고유한 표시나 머리장식, 장신구를 다양하게 사용함으로써 서로 구분했다.
샤카는 표준 전술을 개발했고 줄루족은 모든 전투에서 이 전술을 사용했다(전쟁). 또 임피(전투에 나설 수 있는 조직)를 4집단으로 나누었다. '가슴'이라는 가장 강한 집단은 가까이에서 적을 찔러 무너뜨리고 그사이 '뿔'이라는 두 집단이 양쪽으로 원을 그리며 치달려 적들을 에워싸고 뒤쪽에서 기습했다.
예비부대인 '허리'는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도록 전투장소 근처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가 전체 고리 모양 대형의 위태로운 부분을 증원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었다. 전투는 장교급인 인두나들이 지휘했으며 손으로 신호를 보내 명령을 내렸다. 한 임피는 변함 없이 하루에 약 80㎞씩 행군했고 지나치는 마을에서 곡물과 가축들을 징발했으며 침낭과 식기를 운반할 소년들을 데리고 다녔다.
샤카는 상대를 멸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싸움을 했으며 살아 남은 사람들을 받아들여 줄루족으로 흡수했다.
그는 이웃에 있는 작은 씨족들을 죽이기 시작했는데 첫 상대는 랑게니족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불행하게 만든 남자들을 찾아내어 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담장에 세워진 날카로운 말뚝 끝에다 꽂아버렸다. 1년이 채 못 가 줄루족과 그 전사들의 수는 4배로 불어났다. 1817년까지 샤카의 군주로 있던 딩기스와요가 살해당함으로써 줄루족 세력 확장의 마지막 걸림돌이 없어졌다. 그후 2년 동안은 그를 위협하는 유일하게 강한 부족인 은드완드웨족·콰베족만을 상대로 하여 싸워 마침내 승리했고, 그뒤 해마다 계속 원정을 나가 줄루 제국의 남쪽에 사는 씨족 군(群)을 모조리 멸망시켰다.
1823년경 지금의 나탈 지방은 폐허가 되어 사람이라고는 몇 명 남지 않았으며 겁에 질려 케이프 식민지까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1820년대의 음페카네
샤카가 파괴한 범위는 해안지역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 여파로 1820년대초에 음페카네('깨부수기'라는 뜻)라는 일련의 부족간 전쟁이 일어나 내륙 고원지대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씨족들은 서로 공격하고 줄루족의 분노를 피해 도망다녔으며,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쫓기고 쫓는 무의미한 살육놀이를 시작했다. 이로써 내륙의 씨족구조는 완전히 무너졌으며 2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1830년대에 대이주를 감행한 보어인들은 바로 이 지역을 지나갔는데 이 이주는 사실상 보어인들을 가로막을 어떤 씨족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대이주).
1824년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포르트나탈(지금의 더반)에 도착했다.
페어웰무역회사에 소속된 12명의 정착민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를 잡고 곧 샤카와 접촉했다. 샤카의 마을인 불라와요는 그곳에서 약 161㎞ 북쪽에 떨어져 있었다. 샤카는 유럽인의 풍습과 그들이 가져온 물건에 매혹되긴 했어도 그들의 문명이 훨씬 우수하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의 체류를 허락했다. 이들 초기 유럽인 정착민 가운데 헨리 프랜시스 핀과 너새니얼 이삭스는 줄루족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오늘날 알려진 대부분의 초기 은구니 역사는 이 두 사람의 글에 의한 것이다.
1827년 샤카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눈에 띌 만큼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슬픔으로 인한 발작 증세 때문에 어림잡아 7,000명의 줄루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 사람들은 1년 동안 곡식을 가꾸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줄루족의 기본 식량인 우유도 짜지 않았다. 샤카는 수천 마리의 젖소를 죽여 송아지들조차 어미를 잃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할 정도였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임신부들을 그 남편과 같이 죽여버렸다. 1828년초 샤카는 한 기습작전에서 임피를 남쪽으로 파견해 전사들을 곧장 케이프 식민지까지 이끌도록 했다.
이들은 언제나처럼 휴가를 기대하며 돌아왔으나 샤카는 곧 멀리 북쪽을 공격하도록 보냈다. 이러한 작전은 너무 무리한 것이었고 결국 그는 그해 9월에 두 의붓형제인 딩간·음랑가나, 그리고 음보파라는 장교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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