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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26. 7. 23, 오스만투르크 수글라 이즈미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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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76, 알바니아 둘시뇨 |
국적 | 유대 |
요약
유럽과 중동에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랍비들의 권위를 위협한 거짓 메시아.
Sabbatai Zebi라고도 씀.
청년시절 카발라라는 유대교 신비주의 문헌을 탐독했다.
오랫동안의 황홀경 체험과 강한 개성이 결합되어 많은 제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으며, 22세 때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했다. 랍비들의 분노를 사 스미르나에서 추방당한 그는 과거 카발라의 중심지였던 살로니카로 갔다가, 내친 김에 콘스탄티노플까지 갔다. 그곳에서 그는 신망높고 영향력있는 유대교 설교자·신비주의자인 아브라함 야키니를 만났다. 아브라함 야키니는 샤베타이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거짓 예언문서를 갖고 있었다.
샤베타이는 그뒤 팔레스타인으로 갔다가 다시 카이로로 갔다. 그곳에서 부유하고 유력한 투르크 총독의 재무관 라파엘 할레비를 자기 신도로 만들었다.
신도들이 자기를 떠받들어주고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자, 샤베타이는 의기양양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가자의 나단이라는 20세의 율법연구자가 있었는데, 그는 전통적으로 메시아의 선구자로 알려진 엘리야의 역을 떠맡았다.
나단은 황홀경 속에서 샤베타이가 사자를 타고 머리가 7개 달린 용과 싸워 무혈승리를 거둠으로써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세계 구원이 이루어질 날이 임박했다고 예언했다. 천년왕국 신앙에 따라 그는 1666년이 묵시록적 대격변의 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루살렘 랍비들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자 샤베타이는 1665년 가을 스미르나로 돌아와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의 운동은 베네치아·암스테르담·함부르크·런던을 비롯해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도시들로 확산되었다. 1666년초 샤베타이는 콘스탄티노플로 갔지만, 도착 즉시 감옥에 갇혔다.
몇 달 뒤 그는 아비도스의 성채로 이송되었는데, 그의 신도들은 그곳을 미그달 오즈, 즉 능력의 탑이라고 불렀다. 그해 9월 샤베타이는 아드리아노플의 술탄에게 압송되어 고문을 가하겠다는 위협을 받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의 개종으로 화가 풀린 술탄은 그의 이름을 메메드 에펜디라고 고치고 자신의 문지기로 임명했으며, 그에게 후한 급료를 주었다. 그를 성실하게 따르던 제자들이나 이기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그의 배교에 실망했다. 샤베타이는 점차 술탄의 총애에서 멀어져 추방당한 후 알바니아에서 죽었다.
샤베타이 체비를 중심으로 전개된 운동은 샤베타이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운동은 샤베타이의 영적 권위와 그의 배교 간의 괴리를 메꾸려고 노력했다. 성실한 샤베타이주의자들은 샤베타이의 배교를 메시아적 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하고 샤베타이의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배교의 행동을 했을 경우에도 그가 내적으로 유대인이기만 하면 그러한 외적 행동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다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배교를 하지 않고서도 성실한 샤베타이주의자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676년 샤베타이가 죽은 뒤에도 이 종파는 계속 번성했다. 샤베타이주의의 허무주의적인 경향은 18세기 J. 프랑크에게서 절정을 이루었는데, 그의 추종자들은 비밀축제에서 난교(亂交)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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