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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6. 8. 1, 알제리 오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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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8. 6. 1, 프랑스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최초로 여성용 바지 정장을 도입하는 등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변화를 반영한 자신감 넘치는 의상들을 선보이면서 패션계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냈다. 무대의상 및 여성복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파리의 의상학교에 단기간 입학했던 그는 국제적인 디자인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조수로 고용되었다. 1957년 디오르가 죽자 디오르 의상점의 총관리자가 되었다. 1959년 세련된 긴 스커트와 과감하게 짧은 스커트를 발표하고, 1960년에는 비트족풍의 ‘식 비트닉’을 발표했다. 1962년 자신의 의상점을 열고, 파리의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중의 한 사람으로 급부상했다. 1970년대에는 기성복 허가권, 액세서리, 향수, 남성복 등에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새로운 취향을 이끌고 개척하기보다는 자신의 고전적 작품들을 완성하는 데 만족했다. 2007년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생 로랑은 프랑스의 성공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충분한 중등교육을 받은 뒤 무대의상 및 여성복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파리로 갔다.
의상학교에 단기간 입학했던 그는 국제적인 디자인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때 〈보그 Vogue〉지는 생 로랑의 스케치에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고 했으며, 당시 나이 17세였던 생 로랑은 곧 디오르의 조수로 고용되었다. 디오르의 촉망받는 조수였던 그는 1957년 디오르가 죽자 디오르 의상점의 총관리자가 되었다. '리틀-걸 룩'과 'A라인 실루엣'을 발표한 뒤, 1959년 세련된 긴 스커트와 과감하게 짧은 스커트 등을 발표했다. 1960년에는 모피로 테두리를 장식한 검은 가죽 재킷과 터틀넥을 이용한 비트족풍의 '식 비트닉'을 발표했다.
1960년 프랑스군에 입대한 이후 신경성 허탈(순환부전에 기인한 극도의 피곤과 억압상태) 증세로 고통받던 그는 디자이너 마르크 보앙이 디오르 의상점을 맡게 되면서 그곳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1962년 자신의 의상점을 열고, 파리의 가장 영향력있는 디자이너 중의 한 사람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도시와 시골에서 여성용 바지를 대중화시켰고, 1960년대 후반에는 주로 금속섬유와 투명한 섬유를 소재로 한 작품을 발표했다.
1970년대에는 의상업 이외에도 기성복 허가권, 액세서리, 가정용 리넨 제품, 향수, 남성복 등에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생 로랑은 비록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새로운 취향을 이끌고 개척하기보다는 자신의 고전적 작품들을 완성하는 데 만족했다. 1999년 생 로랑은 기성복 사업을 구치에 10억 달러에 팔았다. 그는 2002년 1월 은퇴를 선언하고 같은 달 파리 퐁피두에서 열린 오트쿠튀르 쇼를 마지막으로 패션계를 떠났다. 그는 최초로 여성용 바지 정장을 도입하는 등 직업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변화를 반영한 자신감 넘치는 의상들을 선보이면서 패션계의 새로운 흐름를 만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생 로랑은 2007년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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