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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신라 705년에 성덕왕이 창건하고, 이후 1376년에 영암이 중창했다. 1464년 왕이 이곳에 행차했다가 문수보살을 배알한 후 고양이 덕분에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건졌다고 하는 일화가 전한다. 이로 인해 다음해에 중창하고 전답을 하사했으며, 이것을 영산부원군 김수온에게 기록하도록 했고, 그 기록인〈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이 월정사에 보관되어 있다.
1469년에 세조의 원찰이 되었고, 1904년에 선원을 개설하고 1907년에 수월화상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선원인 청량선원, 승당인 소림초당, 종각인 동정각, 영산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23점(보물 제793호),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 등이 있다.
이 절은 705년(성덕왕 4)에 성덕왕이 창건했다.
효소왕(692~701 재위) 때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과 효명 두 왕자가 오대산에 입산하여 동쪽에 있는 만월산에는 일만관음보살을, 서쪽에 있는 장령산에는 일만대세지보살을, 남쪽에 있는 기린산에는 일만지장보살을, 북쪽에 있는 상왕산에는 일만미륵보살을, 중앙에 있는 지로산에는 일만문수보살을 첨례했다. 그뒤 성덕왕이 된 효명이 다시 이 산을 방문하여 진여원을 창건하고, 문수보살상을 조성하여 봉안함으로써 이 절이 창건된 것이다. 그뒤 1376년(우왕 2)에 영암이 중창했다.
1464년(세조 10) 왕이 이곳에 행차했다가 문수보살을 배알한 후 고양이 덕분에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건졌다고 하는 일화가 전하는데 이로 인해 다음해에 중창하고 전답을 하사했으며, 이것을 영산부원군 김수온(金守溫)에게 기록하도록 했다.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平昌上院寺重創勸善文〉(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 월정사 소재)이 남아 있다.
1469년(예종 1)에 세조의 원찰이 되었다. 1904년에 선원을 개설하고 1907년에 수월화상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선원인 청량선원, 승당인 소림초당, 종각인 동정각, 영산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23점(보물 제793호),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 등이 있고, 〈상원사중창권선문〉은 한문과 한글이 병기되어 있어 한글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상원사동종
725년 작.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167cm, 입지름 91cm.
현재 우리나라에 전하고 있는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한국종의 형식을 고루 갖추고 있으며 뛰어난 주조기술과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우수한 종이다.
원래 어느 절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경상북도 안동의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안동 누문에 걸려 있던 것을 1469년 국명에 의해 상원사로 옮겼다고 한다. 정상에는 용뉴와 용통이 있는데, 용뉴는 용의 입부분과 발끝이 종과 연결되어 있다. 용통의 표면에는 앙련과 복련을 장식하고 그 사이에 연화무늬와 당초무늬를 조각했다.
종의 몸체는 배가 약간 불룩하고 밑부분이 좁아지는 형태로 종어깨[鐘肩]와 유곽 및 종입구[鐘口]에 문양대를 돌렸는데 연주무늬[連珠紋]를 가장자리에 돌리고, 그 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반원의 테두리 안에 주악비천상과 당초무늬를 장식했다. 종어깨에 붙여서 배치한 4개의 유곽 안에는 각각 연화좌 가운데에서 돋아난 유(乳)를 9개 배치했으며 유의 표면에도 꽃무늬를 장식했다.
종 몸체의 서로 반대되는 2곳에는 구름 위에서 공후(空篌)와 생(笙)을 각각 연주하는 비천상을 2구씩 양주했는데, 하늘 위로 날려올라가는 천의의 율동적인 선과, 악기를 연주하는 자연스러운 자세의 양감 있는 표현은 통일신라의 조각이 지닌 사실미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종의 용뉴 좌우에는 "開元十三年乙丑三月八日鐘成記之"로 시작되는 70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현재 종 입구에 작은 균열이 생겨 수리를 거친 뒤 모작품을 만들어 사용하며 이 종은 치지 않고 보존하고 있다.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1466년 작. 국보(1984.10.15 지정). 높이 98cm. 이 동자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보물, 1984.10.15 지정)에 의하면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그의 남편인 정현조가 득남을 빌기 위하여 오대산 문수사에 문수보살상 등 8구의 보살상과 나한상 등을 조성하여 봉안했다고 되어 있어 어느 때인가 상원사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 동자상은 양쪽으로 묶은 동자머리를 제외하고는 자세, 옷을 입은 방식 등에서는 보살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특이한 상이다. 천진스런 미소를 띤 얼굴은 약간 숙이고 있으며, 굴곡이 안정되게 표현된 신체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비스듬히 묶여져 있는 천의 자락이 1번 둥글게 말려 있으며, 상의가 가슴 아래까지 올라와 있다.
전체적인 옷주름은 인체의 흐름에 따라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목걸이 이외에는 장식이 거의 없다. 오른손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내려 엄지와 약지를 맞댈 듯이 표현되어 있다. 자세에서 왼쪽 다리는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는 밖으로 둔 우서상(右舒相)을 취하고 있다.
이 동자상에서 얼굴을 앞으로 약간 숙인 모습, 불룩한 가슴과 젖꼭지의 표현, 가슴 아래까지 올려 입은 상의가 신체를 마치 반으로 가르는 것처럼 수평으로 처리된 점 등은 1459~93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석가불좌상(수종사팔각5층석탑에서 발견)과 유사하다. 이 문수동자상은 나무의 질감을 최대한 살려 조각한 것으로 조각기술의 극치를 보여주며 제작연대가 정확한 왕실발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불교조각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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