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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은 여러 지방에 산재해 있던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정복·병합하면서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고구려는 초기에 한나라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성장했고, 그를 발판으로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1세기 무렵에는 압록강과 퉁자 강[佟佳江] 유역 일대를 차지했다. 또 태조왕 때에는 동옥저를 복속시켜 영역을 동해안지역에까지 넓히고 풍부한 물자를 공물로 받아들였다. 2세기 무렵에는 요동지방으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꾀했고, 한의 요동군과 현도군을 집중 공격했다.
3세기 동천왕대에는 중국이 위(魏)·촉·오(吳) 3국으로 분립한 유리한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남쪽의 오나라와 적극 교류하면서 위나라를 견제했다. 이때 위나라의 영토인 서안평을 고구려가 선제공격했지만 오히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역습을 받아 국내성이 함락당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4세기에 고구려는 중앙통치조직을 14관등 체계로 정비하고 태수·수·재 등을 지방에 파견하여 국내의 통치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한편, 중국이 다시 5호 16국으로 분열된 틈을 타서 재차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여 탈취했다. 이때 고구려는 대동강유역으로 진출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했다. 이로써 평양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여 배후의 위협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이후 요동의 중심지인 서안평을 발판으로 영토를 확대해나갔다.
백제는 북방의 낙랑·말갈 세력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동시에 남쪽의 마한지역으로 진출하면서 팽창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시조 온조왕대에 마한의 목지국을 병합했고, 영토가 북으로는 예성강, 동으로는 지금의 춘천, 남으로는 지금의 공주, 서쪽으로는 서해안지역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3세기 후반 고이왕대에는 넓어진 영토와 주민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중앙의 통치조직을 정비했다. 6좌평제도와 16관등제도는 이때 정비되었다. 더욱이 4세기 이후에는 중국의 요서지방을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며, 계속해서 중국의 산둥[山東] 지방이나 일본으로도 진출했다.
신라는 초기에 박·석·김의 3개 성씨 세력이 돌아가면서 왕위를 차지했다. 이는 여러 세력이 합쳐서 건국된 결과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세기 무렵부터 신라가 주위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통합하면서 팽창했다고 한다. 신라는 먼저 남동쪽 해안에 있던 울산과 동래지역의 소국을 정복했다. 이 지역들은 뱃길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곳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동해안지역과 낙동강유역의 소국을 차례차례 정복하여 복속시켰다.
〈삼국사기〉는 이때가 2세기 초반 무렵이었다고 전하나 그대로 믿기 어렵고, 대략 100~200년 정도 아래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4세기말 무렵 내물마립간 때에 왕권을 강화했고, 왕의 칭호도 대수장을 의미하는 마립간으로 바꾸었다. 이때 남쪽 지방에 왜가 쳐들어 오자,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다.
6세기 초반 신라는 처음으로 신라라는 국호를 칭했고, 왕이라는 칭호도 사용했으며 순장제도를 금지했고, 얼마 뒤에는 국가의 기간이 되는 법령을 반포했다. 이때 신라는 관위체계로서 경위 17관등과 외위제를 마련했다. 6세기 초반에 이르러 고구려·백제와 정립하는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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