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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인도의 왕가.
〈푸라나 Purāṇa〉(고대 인도의 종교 설화집)에 근거한 일부 해석에 따르면 안드라 '자티'(부족) 출신이며 다크시나파타, 즉 남부지역에 제국을 세운 최초의 데칸 왕조이다(데칸 고원). 왕조의 전성기에는 멀리 서인도와 인도 중부까지 장악했다.
일부 권위자들은 이 가문의 시작을 BC 3세기경으로 보지만 〈푸라나〉에 실려 있는 내용에서 볼 때 사타바하나가 패권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은 BC 1세기 말경인 것으로 보인다. 본래 사타바하나의 지배는 데칸 서부의 일부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나나가트·나시크·칼리·칸헤리 같은 지역의 동굴에서 발견되는 비문들은 시무카, 크리슈나, 샤타카르니 1세 등의 초기 통치자들을 기념한 것이다.
사타바하나 왕조는 초기부터 당시 인도-로마 무역의 중심지였던 서해안 항구들과 가까이 있었고 샤카 사트라프 왕조의 서부 지역과도 영토상으로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2개의 인도 왕국간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분쟁의 첫번째 단계에서는 샤카 사트라프의 나하파나가 나시크 지역과 서 데칸의 다른 지역들을 침공했다. 이후 사타바하나는 이 가문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였던 가우타미푸트라 샤타카르니(106경~130 재위) 때에 다시 강력해졌다. 그는 북동쪽의 라자스탄에서 남동쪽의 안드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서쪽의 구자라트에서 동쪽의 칼링가까지 광활한 영토를 점령했다. 그러나 150년 이전에 크사트라파는 샤카 사트라프 사타바하나로부터 이들 지역 대부분을 되찾았으며 사타바하나에게 2번이나 패배를 안겨주었다.
가우타미푸트라의 아들 바시슈티푸트라 풀루마비(130경~159 재위)는 서쪽에서 정복을 시작하여 주로 동쪽과 북동쪽으로 꾸준히 영토를 확장했다.
바시슈티푸트라 풀루마비의 비문과 주화들이 안드라에서까지 발견되고 있으며 시바슈리 샤타카르니(159경~166 재위)는 크리슈나와 고다바리 구(區)에서 발견된 주화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또 슈리 야지냐 샤타카르니(174경~203 재위)의 지방 주화들은 크리슈나와 고다바리 구, 마디아프라데시의 찬드라 구, 베라르, 북부 콘칸, 사우라슈트라에까지 분포되어 있다.
슈리 야지냐는 사타바하나 왕조사의 마지막 중요 인물이다. 그는 샤카 사트라프와 싸워 승리했지만 주로 〈푸라나〉에 실려 있는 계보와 주화를 통해 알려진 그의 후계자들은 비교적 한정된 지역만을 통치했다.
후기 화폐 발행의 '국지적' 특성과 그 분포양상으로 볼 때 사타바하나 제국은 계속해서 분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드라 지역은 처음에는 이크슈바쿠인들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팔라바 왕조로 넘어갔다. 서 데칸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새로운 지방세력들, 즉 추투·아비라·쿠루 왕국들이 등장했다.
베라르 지역에서는 4세기초에 바카타카 왕국이 위협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사타바하나 제국은 이즈음 완전히 해체되었다.
BC 4~3세기에 북마우리야 왕조가 이룬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이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시대에 들어서게 된 것은 사타바하나 왕조 때부터였다. 중앙집권적인 행정체계가 발전되었는지에 대해서 밝혀주는 자료는 없지만 제국 전체에 걸쳐 광범한 통화체계가 도입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또 인도-로마 무역도 이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이로 인한 물질적 풍요는 동시대의 비문들에 새겨진 것처럼 불승(佛僧)과 브라만 사회에 아낌 없는 후원이 이루어졌던 데에서 잘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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