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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52. 8. 14, 베네치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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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23. 1. 14, 베네치아 |
국적 | 이탈리아 |
요약
이탈리아의 학자.
별칭은 Pietro Soave Polano.
개요
그의 조국 베네치아가 교황 파울루스 5세와 싸울 때 베네치아의 편에서 애국적인 활동을 했다.
신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1610~18년 교황 절대주의를 비난하는 중요한 저서인 〈트리엔트 공의회의 역사 History of the Council of Trent〉를 썼으며 이탈리아인으로서 일찍이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옹호했다.
어린시절과 경력
아버지 프란체스코 사르피는 성공하지 못한 사업가였고, 어머니 이사벨라 모렐리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유명한 베네치아 가문 출신이었다.
사르피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와 성직자인 외삼촌 암브로조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민감하고 학구적이며 영리한 사르피는 14세 때 성모 마리아 시종회라는 수도원에 들어갔고 20세 때 만토바 공작의 궁정 신학자가 되었는데, 그에게 그리스어·히브리어·수학·해부학·식물학 등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젊은 사르피는 겸손과 도덕적 진지함 때문에 '라 스포사'(새 신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중키에 굵은 눈썹, 기다란 코, 검은 눈과 숱이 적은 턱수염을 가진 그는 소박한 삶을 살았으나 건강이 나빠 고통을 받았다. 그는 사진처럼 정확한 기억력을 가졌고 무척 끈기있는 학자였다고 한다.
27세 때 사르피는 수도회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단호하지만 현명하고 분별있는 지도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로마를 몇 차례 방문해 교황 식스투스 5세 및 유명한 신학자 로베르토 벨라르미네와 친해졌다. 그는 해부학 연구를 계속해 피의 흐름을 원활히 해주는 혈관 판막을 발견했고, 눈동자가 빛의 작용으로 팽창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입증했다.
그는 친구가 많았으며 그중에는 갈릴레오도 있었다. 갈릴레오는 사르피를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라고 생각했고 사르피는 로마 당국이 천문학자 갈릴레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을 비난하면서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면, 갈릴레오가 당한 수모와 위대한 인물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개탄하는 날이 올 것을 나는 확신한다"고 말했다.
베네치아 공화국 옹호
세계주의적인 주민들을 가진 베네치아는 오래 전부터 관대한 종교 정책을 채택하고 베네치아 내부문제에 대한 로마의 어떤 간섭에도 반대하고 있었다.
1606년에 교황 파울루스 5세는 교회 건축을 제한하는 베네치아의 법률을 폐지하고, 베네치아에 두 성직자를 교황청에 넘기라고 요구했다. 교황이 요구한 두 성직자 가운데 하나는 살인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베네치아 정부는 그를 민간 법정에서 재판할 작정이었다. 베네치아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파울루스는 베네치아 원로원과 도제(베네치아 국가 원수)에게 파문 선고를 내리고,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해서는 성무(聖務) 금지령을 내렸다.
이것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모든 성직자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다.
정부의 고문으로 있던 사르피는 베네치아의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글을 썼다(교회와 국가, 교황무류성). 교황은 신앙문제에 있어서만 무오류이기 때문에 교황의 성무 금지령은 설득력이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군주는 신에게서 권한을 받는다. 따라서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대해서는 오직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것이 사르피의 기본신조였다. 교회 재산은 이미 광대해져 있고 나라에 세금을 한푼도 내지 않으므로 베네치아처럼 작은 도시에서는 교회 건축물을 제한하는 것이 공공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또한 두 성직자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들이 성직자로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당연히 교회가 재판권을 갖지만 살인이나 간통 같은 범죄에 대해서는 세속 법정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교황의 성무 금지령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것이 사르피의 결론이었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그의 충고에 따랐다.
사르피의 문체는 명쾌하고 재치가 있었으며 법률 교과서가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서 근거를 끌어냈다. 예를 들면 그는 교황의 권위가 사도 베드로의 권위를 넘어서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사르피의 글은 베네치아 사람들의 사기를 유지하고 외국의 공감을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황 파울루스 5세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이 컸던 스페인을 강력한 동맹자로 삼고 있었는데 그가 무력에 호소하겠다고 위협하자 베네치아는 프랑스의 지원을 확보하고 더 나아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도 지원을 요청하겠다고 위협했다. 마침내 교황은 베네치아가 프로테스탄트로 돌아설 것을 두려워해 타협에 합의했다. 성무 금지령은 끝났고 베네치아는 두 성직자를 교황에게 넘겨주었지만 세속 법정에서 성직자를 재판할 권리는 내놓지 않았다. 사르피는 "공화국은 교황의 요구를 뿌리쳤다.
지금까지 그토록 엄숙하게 발표된 교황의 성무 금지령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사르피는 로마 종교 재판소에 출두하라는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1607년 10월 5일 그는 길거리에서 공격을 받고 칼에 찔렸다. 그는 로마 교황청의 소행이라고 비난했지만 이 혐의는 끝내 입증되지 않았다.
사르피의 글
1610~18년 사르피는 베네치아에 보관된 공문서와 개인 서류, 특히 트리엔트 공의회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했던 아르노 뒤 페리에의 서류를 이용해 트리엔트 공의회(1545~63)의 역사를 처음으로 완전하게 기술했다.
사르피는 이 종교회의가 주교들에게 좀더 많은 자율성을 주지 않았고,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로마 교황청의 절대주의를 더 확대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사르피의 저서 가운데 생전에 출판된 것은 1619년에 피에트로 소아베 폴라노라는 가명으로 런던에서 발간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역사〉뿐이다. 이 책은 로마의 '금서 목록'에 올랐지만 판을 거듭해 출간되었고 10년 동안 5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사르피의 글이 대부분 그렇듯이 〈역사〉도 프로테스탄트를 염두에 두고 쓴 파당적 저서이다.
사르피는 프로테스탄트가 베네치아와 손잡고 로마와 스페인에 맞설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인 동맹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방대한 편지를 통해 프랑스의 위그노나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를 비롯해 로마에 대해 독자 노선을 취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우정을 얻으려고 애썼지만, 그가 정통 로마 가톨릭이 아닌 다른 교리를 믿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사르피는 로마 교회 자체와 다툰 것이 아니라 참견하기 좋아하는 로마 교황청과 싸웠을 뿐이었다.
말년에 사르피는 베네치아 사람들의 영웅적 존재가 되었고 파문당했지만 끝까지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162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베네치아여, 끝까지 버텨라"라는 마지막 말은 과연 그다운 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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