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마르키 사드

다른 표기 언어 Marquis de Sade
요약 테이블
출생 1740. 6. 2, 프랑스 파리
사망 1814. 12. 2, 파리 근처 샤랑통
국적 프랑스

요약 사드는 '새디즘'이란 용어를 낳은 성애 문학의 저자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인 <미덕의 재난>은 1787년에 발표되었으며, 이듬해에 단편집 <사랑의 범죄>가 나왔다. 그 후의 작품으로는 <쥐스틴>(1791), <쥘리에트>(1798)가 있다.

사드(Marquis de Sade)

ⓒ Jean-Marc Nattier/wikipedia | Public Domain

젊은시절

사드 가문은 콩데 왕가의 친척으로, 14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가 시에서 노래하여 불후의 명성을 얻은 로드 드 노브가 조상이다.

콩데 왕가의 저택에서 사드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외교적 사명을 띠고 쾰른 선제후의 궁정에 파견되어 있었고, 그의 어머니 마리 엘레노르 마예 드 카르망은 콩데 왕비를 모시는 시녀였다. 그는 뷔제·발로메·젝스 지방에 있는 영지뿐 아니라, 라코스트의 소만에 있는 영지와 마장의 공동 영지 가운데 프랑스에 있는 영지들도 물려받았다. 삼촌인 에브뢰유의 사드 신부한테서 초기 교육을 받은 뒤, 파리의 루이 르 그랑 중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사드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국왕 친위대에서 다양한 계급을 딸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1754년에 군대 생활을 시작했지만 7년전쟁이 끝난 1763년에 군대를 떠났고, 같은 해 돈 많은 부르주아 가문인 몽트뢰유 집안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은 군주의 권한 아래 있는 파리 고등법원의 총재였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두 아들 루이 마리와 도나티앵 클로드 아르망, 그리고 딸 마들렌 로르를 두었다.

결혼 직후부터 사드는 이미 수많은 남자 후원자들과 염문을 뿌렸던 여배우 라 보부아쟁과 연애를 시작했다.

그는 아르쾨유에 있는 자신의 '작은 집'에 창녀들을 불러들여 온갖 가학적인 성행위로 그녀들을 학대했다. 이런 행위 때문에 그는 왕의 명령으로 뱅센 감옥에 갇혔다. 몇 주일 뒤 풀려났으나 다시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여 빚더미 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갔다. 이윽고 1768년에 처음으로 공개적인 추문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로즈 켈러 사건이다.

로즈 켈러는 그가 부활절 일요일에 파리에서 만난 젊은 창녀였다.

그는 로즈를 아르쾨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가 방에 가두어 놓고 성적으로 학대했다. 로즈는 그 집에서 나와 이웃 사람들에게 상처를 보여주면서, 사드의 비정상적인 행위와 잔인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드는 이 일로 인해 리옹 근처의 피에르앙시즈 요새에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 라코스트 성에 틀어박혀 있던 사드는 1772년 6월에 상당량의 돈을 구하기 위해 마르세유로 갔다. 이곳에서 하인인 라투르를 시켜 창녀들을 데려오게 한 다음, 여느 때와 같은 성적 가혹 행위를 저질렀다.

라투르는 주인의 명령으로 동성애 행위를 해야만 했다. 젊은 여자들은 후작의 약통에 가득 찬 사탕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는데, 이 사탕에는 성욕을 자극하는 최음제가 들어 있었다. 얼마 후 그들은 위에서 심한 통증을 느끼자, 사드가 독약을 먹였다고 고발했다. 사드와 라투르는 사르데냐 왕의 영지로 달아났지만, 곧 체포되었다.

그들은 엑스 고등법원의 궐석재판(闕席裁判)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1772년 9월 12일 그 처형은 인형(人形)으로 대신되었는데, 그 이유는 사형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그가 이미 미올랑 요새에서 도망친 뒤였기 때문이다. 탈출에 성공한 사드는 이미 애인 사이가 된 처제 로네 수녀와 함께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이에 격분한 장모는 직접 나서서 사드를 추적했고, 그는 이 추적을 피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가 라코스트로 다시 돌아와 아내와 재회한 것은 1776년 11월 4일이었다.

아내는 그의 공범자가 되어, 남편이 납치해온 소년 소녀들과 더불어 난잡한 쾌락을 함께 즐겼다. 소문이 퍼졌고, 추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며, 마침내 소년 소녀들의 부모가 고발하는 바람에 사드는 체포되어 1777년 2월 13일 뱅센의 지하 감옥으로 보내졌다.

이 감옥의 여건들은 가혹했다. 여기에 갇혀 있는 동안 사드는 간수 및 형무소 소장과 싸웠고, 동료 죄수인 미라보 후작 빅토르 리케티를 모욕하여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으며, 다른 죄수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도 했다. 그의 아내는 마침내 남편을 면회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사드는 아내가 자기를 떠나려고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한 나머지 질투와 분노로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에, 아내의 면회는 다시 금지되고 그녀는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저술활동

사드는 감옥 생활의 지루함과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성애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과 희곡을 썼다.

1782년 7월에 〈한 성직자와 죽어가는 남자의 대화 Dialogue entre un prêtre et un moribond〉를 완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선언했다. 아내와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깊게 맺힌 반항 정신과 번득이는 재치가 뒤섞여 있다. 1784년 2월 27일에 그는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는 약 12m 길이의 종이 두루마리에 〈소돔의 120일 Les 120 Journées de Sodome〉을 썼는데, 수없이 다양한 성적 도착 행위를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1787년 〈미덕의 재난〉을, 1788년 중편소설 및 단편소설들을 썼는데, 이 작품들은 나중에 〈사랑의 범죄〉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가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기 며칠 전에 사드는 창문을 통해 "놈들이 죄수들을 학살하고 있다. 빨리 와서 죄수들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는 샤랑통의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1790년 4월 2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사드는 석방되자마자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을 비롯한 여러 극장에 몇 편의 희곡을 보냈다.

그 가운데 5편이 채택되었지만, 몇 편만 공연되었다. 아내와 헤어진 그는 젊은 여배우이며 과부인 케네와 함께 살면서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운 Justine, ou les malheurs de la vertu〉과 〈쥘리에트〉라는 장편소설을 썼다. 1792년에 그는 파리에서 피크당(les Piques) 혁명 분과의 간사가 되었고, 파리의 병원들을 방문하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애국적인 연설문을 썼다.

공포정치시대에 사드는 자신을 여러 번 감옥에 보낸 장본인인 장인과 장모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는 혁명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온건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실수로 망명자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그는 혁명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기 전날, 운좋게도 단두대에 오르는 것을 면했다.

당시 그는 과부 케네와 함께 비참할 만큼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1801년 3월 6일에 그는 그의 책들을 출판한 출판업자의 사무실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무실에서는 이미 출판된 〈쥐스틴〉과 〈쥘리에트〉 및 그가 갖고 있던 메모와 손으로 쓴 여러 묶음의 원고가 발견되었다. 그는 당시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추문을 일으켰다.

그는 부당한 감금에 대해 거듭 항의했지만, 나폴레옹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의 항의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사드한테서 모든 행동의 자유를 박탈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그런데도 그는 샤랑통에서 자신의 희곡들을 상연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야심적인 장편소설 〈플로르벨의 나날, 또는 베일을 벗은 자연 Les Journées de Florbelle, ou la nature dévoilée〉을 쓰기 시작하여, 계획한 10권 가운데 2권을 끝마쳤다. 그가 죽은 뒤 맏아들은 그의 원고들과 함께 이 글도 불태워버렸다.

그의 유해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초상화는 1점도 남아 있지 않다. 1806년에 쓴 유언장에서 그는 이렇게 당부했다. "내 무덤의 흔적을 이 지상에 남기지 말라. 나는 나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지워질 것이라고 자부하니까."

사드에 대한 평가

동시대인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준 인생을 사는 동안, 사드는 자신의 작품에 다루어진 수많은 성행위를 실제로 체험했다. 그의 글은 프랑스 법원의 판결에 따라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어 있다. 작가로서 그는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에서는 그를 본능의 발산을 거의 범죄적인 수준까지 옹호하는 절대 악의 화신으로 생각하고, 다른 편에서는 그가 모든 형태의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인간의 완전한 자유를 옹호한 투사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은 19세기에 특히 작가와 화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널리 읽혔다. 20세기초에 사드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노력에 힘입어 문화의 영역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사드의 저서를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의 글은 사상사에 속하며, 문학사에서 중요한 기점을 이룬다. 그는 근대의 '저주받은 작가들' 가운데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작가

작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멀티미디어 더보기 4건의 연관 멀티미디어 마르키 드 사드
다른 백과사전


[Daum백과] 마르키 드 사드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