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71. 1. 17, 잉글랜드 체셔 낸트위치 근처 스태플리 하우벡로지 |
---|---|
사망 | 1936. 3. 11, 런던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해군원수.
lst Earl Beatty, Viscount Borodale of Wexford, Baron Beatty of the North Sea and of Brooksby라고도 함.
유틀란트 전투(1916)에서 영국 순양함을 지휘했다. 해군대령 데이비드 롱필드 비티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4년 해군장교 후보생으로 출발하여 1896~98년 이집트와 수단에서 복무한 뒤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중국에서 근무했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해군 대령이 되었고 1911년 소장으로서 해군 장관인 윈스턴 처칠을 보좌했다.
1913년 순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비티의 함대는 헬골란트 만(灣)을 공격하여 아군의 피해 없이 순양함 3척과 구축함 1척을 침몰시켰다. 몇 개월 뒤에는 영국 해안도시를 3번째 공격하려는 독일 히퍼 제독의 함대를 중간에서 차단하고, 추격전을 펼쳐 독일 순양함 '블뤼허'호를 침몰시켰다. 이 싸움은 도거뱅크 전투로 알려져 있다. 1916년 5월 31일 유틀란트 전투에서 히퍼가 이끄는 선봉 순양함과 격렬한 추격전을 벌였다. 수적으로는 우세하나 독일함대의 포격을 견딜 수 없었던 비티 함대는 '인디패터거블호'와 '퀸 메리호'가 침몰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그는 독일의 외양(外洋) 함대를 젤리코 제독이 이끄는 영국 대함대가 기다리는 북쪽으로 유인하여 전투를 벌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주요목표는 달성했다. 결과적으로 이 유틀란트 전투는 어느 편이 이겼다고 말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1916년 12월 젤리코가 해군본부위원회 제1군사위원으로 임명되면서 비티는 대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비티는 1919~27년 해군본부위원회 제1군사위원으로 일하면서 평화시 해군의 규모를 줄이고 전력을 현대화하는 일을 맡았다. 1921년에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영국 대표로 파견되었다. 1914년 바스 훈장, 비티 백작이 된 1919년에는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