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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56. 4. 23, 프랑스 라로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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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19. 6. 3,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근처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법률가·정치평론가.
자코뱅 독재 시기(1793~94)에 프랑스를 통치한 공안위원회 의원이었다. 라로셸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대학교와 푸아티에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쥐이의 오라토리오회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1785년 파리에서 변호사가 된 뒤 1787년경 프랑스 교회와 정부를 공격하는 익명의 소책자를 썼으며, 1789년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자코뱅 클럽에 들어갔다.
'코뮌 혁명정부' 일원으로서 1792년 8월 10일 군주제를 타도한 민중봉기를 계획하는 데 기여했다. 9월 21일 소집된 혁명적 국민공회의 대의원으로 뽑혔으며, 그의 제안으로 그 다음날 공화정이 선포되었다. 이어서 온건파인 지롱드당과의 투쟁에 뛰어들었다. 1793년 6월 2일 지롱드당 지도자들이 국민공회에서 쫓겨나고 자코뱅당이 혁명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무렵 파리의 상퀼로트(임금생활자와 소상인계급)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은 자크 에베르가 이끄는 자코뱅 좌파의 지도를 원했다. 그는 〈공화주의의 요소 Éléments du républicanisme〉(1793)에서 부의 재분배 및 모든 노동자의 취업 보장을 비롯한 에베르파의 요구를 밝혔다.
파리 대중의 불만에 힘입은 에베르파는 국민공회에 압력을 넣어 비요 바렌과 콜로 데르부아를 1793년 9월 6일 공안위원회 의원으로 지명하도록 했다. 프랑스 공화력 프리메르('서리의 달') 14일(1793. 12. 4), 그는 공안위원회에 지방공무원에 대한 절대권을 주는 법률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공안위원회 의장인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3월 에베르파 지도자들을 단두대로 보내 처형했으나, 다음달에는 비요 바렌과 콜로 데르부아의 압력을 받고 자코뱅당 우파 지도자인 조르주 당통을 제거했다.
그뒤 비요 바렌은 로베스피에르의 지도권에 도전해 콜로 데르부아를 비롯한 로베스피에르 반대파들과 함께 테르미도르 9일(1794. 7. 27)에 로베스피에르를 몰락시키는 데 일조했다. 자코뱅 정권을 무너뜨린 테르미도르 반동이 계속되어 콜로 데르부아와 함께 프랑스령 기아나로 추방당했고(1795. 4), 거기서 결혼하고 농부가 되었다. 1800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사면 제의를 거절했으며 1816년 뉴욕으로 갔다가 다음해에 아이티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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