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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비는 재료에 따라 석비·목비·철비 등으로 분류되며, 현존하는 비는 대부분이 석비이다. 석비는 네모난 형태의 입석은 비, 원형은 갈이라 부르며 총칭해서 비갈이라고 한다. 비문의 내용에 따라 탑비·묘비·신도비·사적비·송덕비 등으로 분류된다.
삼국시대에는 자연석 또는 모가 난 석재에 비문을 새겼으나 통일신라시대에는 네모난 대좌에 귀부를 안치하고 그 위에 비좌와 비신을 차례로 얹은 다음 이수로 장식했다.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는 85년의 점제현신사비가 가장 오래되었고, 그외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와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 창녕비 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탑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능묘 앞에 세우는 묘비는 대개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고승의 탑비를 비롯하여 신도비·묘비가 많이 세워졌다.
비는 재료에 따라 석비·목비·철비 등으로 분류되며, 현존하는 비는 거의 모두 석비이다. 석비는 네모난 형태의 입석은 비(碑), 원형은 갈이라 부르며 총칭해서 비갈이라고 한다.
비문의 내용에 따라 탑비·묘비·신도비·사적비·송덕비 등으로 나누어진다. 중국 주대부터 시작되어 석비의 전성기인 한대(漢代)를 거쳐 당대에 이르러 비로소 이수·제액·비신·귀부 등을 갖춘 전형적인 석비 형식이 이루어졌다. 현존하는 최고의 예는 317년에 세워진 한대의 배잠기공비로 비의 머리부분인 이수는 3각형과 같이 뾰족한 모양으로 초기의 형식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는 자연석 또는 모가 난 석재에 비문을 새겼으나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중국 당대의 석비 형식에 따라 네모난 대좌에 귀부를 안치하고 그 위에 비좌와 비신을 차례로 얹은 다음 이수로 장식했다.
귀부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로서 초기에는 거북이의 목이 앞으로 쭉 뻗어 있고 머리부분을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했다. 그러나 귀두가 점차 용의 모습으로 변하고, 목도 S자 형태나 직립으로 표현되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머리에는 뿔과 같은 돌기가 나타나는 등 복잡하게 되었다.
이수는 뿔이 없는 용이 서린 모양으로 주로 석비의 머리부분을 장식하는데, 처음에는 당비를 모방한 원규 또는 원수 형식으로 용 6마리가 서로 몸을 휘감으면서 뒷발로는 보주를 받쳐들고 있듯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점차 시대가 내려올수록 용과 구름무늬를 섞어서 조각하고 비신을 물고 있던 용의 머리를 대칭적으로 표현하거나 또 이수 중앙에 장식된 보주를 서로 빼앗으려고 하듯이 머리를 쳐들고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는 85년의 점제현신사비가 가장 오래되었고 그 다음으로는 압록강 지안[輯安]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414)와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 창녕비(경남 창녕군 소재), 북한산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황초령비(함경남도 황초령 소재), 마운령비(함경남도 마운령 소재) 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관계의 탑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능묘 앞에 세우는 묘비는 대개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태종무열왕릉비 귀부와 이수, 무장사지 아미타조상탑비 귀부와 이수, 성덕왕릉비 귀부, 흥덕왕릉비 귀부,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이수 등이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고승의 탑비를 비롯하여 신도비와 묘비가 많이 세워졌다. 이러한 석비는 비문의 내용이 주로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학·문자학·서예학은 물론이고 귀부와 이수에 나타나는 조각 양식의 시대적 변천 등으로 보아 미술사에서도 문양·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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