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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0. 1. 31, 미국 펜실베이니아 웨스트브라운즈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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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3. 1. 27, 워싱턴 D. C.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정치가·외교관.
1859~93년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범미주의운동(汎美主義運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메인 주 오거스타로 이주하여 1854년에 진보혁신 성향의 공화주의계 일간지 〈케니벡 저널 Kennebec Journal〉의 주필이자 공동소유주가 되었다.
1856년 새로 출범한 공화당의 제1차 전당대회에 참가했고 1858년부터 1862년 연방하원의원으로 선출될 때까지 메인 주의회에서 활동했다. 남북전쟁 이후에는 열렬한 흑인 참정권 주창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남부의 재건정책에 있어서는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1868년 제임스 블레인은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뛰어난 웅변술과 지도력으로 부동의 지지세력을 얻게 되었다. '영예로운 기사'라는 블레인의 별명은 일리노이 주의 로버트 G.잉거솔 대령이 붙인 것으로 잉거솔은 1876년 전당대회에서 블레인을 대통령후보로 추천했으나, 사리사욕을 위해 직권을 남용했다는 비난에 설득력 있게 대처하지 못한 블레인은 7차 투표에서 러더퍼드 B. 헤이스에게 대통령후보 자리를 넘겨주었다.
선거 직후 블레인은 공석이었던 상원의원에 지명되었고 곧이어 정식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880년 블레인은 재차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패배했으나 제임스 A.가필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상원의원직을 사퇴하고 국무장관이 되었다.
국무장관 재직시 긴장완화와 먼로주의의 강화를 위해 1800년대초 제기되었던 전쟁방지 중재안 채택을 위한 '범아메리카 회의' 소집건을 다시 들고나왔다(1881). 그러나 범미주의운동의 출범을 의미했던 가필드 대통령의 암살로 블레인이 국무장관직을 사퇴하고 후임 국무장관에 의해 회의안이 보류됨에 따라 무산되었다.
블레인은 1884년 마침내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승리했지만 미국의 역사상 가장 힘겨운 선거전을 치르고 그로버 클리블런드 민주당 후보에게 근소한 표차로 패배하고 말았다. 1889년 공화당이 다시 집권당이 되자 제임스 블레인은 국무장관에 취임했다. 국무장관 자격으로 그는 전년도 의회의 승인을 얻은 제1차 범아메리카 회의의 의장직을 맡았으나 범아메리카 회의가 이루어낸 유일한 실질적인 성과는 개별적인 호혜조약 체결에 대한 권고뿐이었다.
관세동맹과 중재에 대한 블레인의 제안은 채택되지 못했다. 제임스 블레인은 1892년 6월 국무장관직을 사임했다. 이는 건강이 나빠진 탓도 있었지만 자신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려는 당내의 움직임을 의식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사임한 지 7개월도 채 안 되어 사망했다. 정평 있는 전기로 데이비드 S.머지가 쓴 〈제임스 G. 블레인:지난날의 우상 James G.Blaine:A Political Idol of Other Days〉(193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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