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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공동체 삶이라는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에 세운 실험농장(1841~47).
정식 명칭은 The Brook Farm Institute of Agriculture and Education.
이 실험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농장 자체는 매사추세츠 주(州) 보스턴 근처 웨스트록스베리에 있었으며, 이 농장을 조직하고 이끈 사람은 사실상 조지 리플리였다. 그는 유니테리언파의 전직 목사였으며 〈다이얼 The Dial〉(월간 문예비평지)의 편집자이자 보스턴 지역 지식인들의 비공식 모임인 '초월자 클럽'의 지도자였다. 폭넓은 교양과 학문을 두루 갖춘 아내 소피아 다나 리플리도 그를 도왔다.
협약의 규정에 따르면, 브룩 농장은 지식인과 노동자들을 이어주고 최대한의 정신적 자유를 보장하며, 경쟁적인 제도의 압박 속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건전하고 소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자유롭고 교양 있는 사람들의 사회를 준비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 사업의 재정은 주식판매로 조달되었다.
주식 1주를 사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협회의 성원이 되고 협회는 이사진이 운영했다. 만일 이윤이 생기면 1명이 하루 일한 양의 합계에 해당하는 총주식수에 따라 분배했으며 모든 성원들은 하루 노동에 대해 한 주씩을 받았다. 창립 주주들 중에는 찰스 A. 다나, 내서니얼 호손 등이 있으며 이 두 사람은 첫 농업이사로서 일했다. 랠프 왈도 에머슨, 브론슨 올콧, 마거릿 풀러, 엘리자베스 피보디, 시어도어 파커, 오레스테스 A. 브라운슨 등도 이 농장에 흥미를 느끼고 방문했다.
브룩 농장은 지식인(70~80명의 회원들 가운데는 항상 교사가 많았음)뿐만 아니라 농민과 수공업자의 관심도 끌었다.
농장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하루 노동(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에 대하여 1달러씩 지불했으며 집과 의복, 그리고 식량을 모든 성원들과 식솔들에게 실비로 제공했다. 아울러 이 공동체는 사회 정치 문제를 다루는 주간지 〈선구자 The Harbinger〉를 4년 동안 발간했다. 제임스 러셀 로웰, 존 그린리프 휘티어, 호레이스 그릴리 등도 여기에 가끔 기고했다.
브룩 농장은 농장 산하 학교의 우수한 시설과 현대적인 교육이론으로 특히 유명했다.
이 학교에서는 "학생과 교육기구 사이에 완전히 자유로운 관계"를 세우고자 했다. 또 학교 규율에서 징벌적인 성격을 완전히 없앴으며,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책임감을 심어주고 지적 작업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면밀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이 학교에는 규정된 학습시간이 없었고 학생들은 하루에 2~3시간 정도의 육체노동을 했으며 유치원·초등학교, 그리고 6년 동안의 대학준비과정이 있었다. 공동체 생활이 불리한 점도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지만(호손은 그곳에서는 글을 쓸 수 없어서 6개월 만에 떠났음) 얼마 동안은 설립자들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공동체, 즉 팔랑주(부룩 농장이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의 이론을 받아들인 1844년 이후 농장을 '팔랑스'로 불렀음)는 3년 이내에 4개의 주택과 작업실 그리고 기숙사들을 더 세웠다. 그런 다음 팔랑스테르라는 커다란 중심 건물을 짓는 데 모든 기금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 팔랑스테르는 완공 기념식을 거행하는 도중에 불이 나서 전소되었다.
그곳의 거류민들이 한동안 열심히 애썼지만 사업은 점차 기울고, 땅과 건물들은 1849년에 모두 팔렸다. 리플리는 1880년 사망할 때까지 그릴리의 〈뉴욕 트리뷴 New York Tribune〉지에서 문예비평가로 활동했다.
브룩 농장은 19세기 전반 미국에서 이루어진 많은 공동체 생활 실험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농장이 다른 경우들보다 잘 알려지고 미국 사회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된 것은 농장과 관계 맺은 저명한 문필가들 및 지식인 지도자들 때문이었다. 호손의 〈블리스데일 로맨스 The Blithedale Romance〉(1852)은 브룩 농장 생활의 여러 측면을 소설로 다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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