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21. 6. 13, 파리 |
---|---|
사망 | 1901. 1. 19,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정치가·학자.
프랑스 제3공화국 초기의 중요한 시기에 2번 총리를 지냈으며 왕정복고를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마드리드와 로마에서 잠시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미 라이프니츠의 신학체계에 관한 책을 번역·출간한 그는 〈두 세계 평론 Revue des Deux Mondes〉지와 오를레앙가의 왕위계승을 옹호하는 왕당파들의 기관지 〈코레스퐁당 Le Correspondant〉에 글을 기고했다.
〈4세기 교회와 로마 제국 L'Église et l'empire romain au IⅤe siècle〉(6권, 1856~66)을 쓰던 중인 1862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뽑혔다.
1871년 2월 외르 주 대표 국민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며칠 후 런던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872년 3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무역 및 통상조약 협상에 대해 호된 비판을 받은 뒤 외교관직을 사임하고 국민의회에서 활동하며 당시의 공화국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에 반대하는 보수파 운동을 이끌었다.
티에르가 물러나고 보수주의자 마크 마옹 원수가 대통령이 되자 총리 겸 외무장관(1873. 5)을 맡았으며 후에 내무장관(11. 26)을 지냈다. 그의 내각은 극단적인 보수성향 때문에 공화주의자들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한편 그는 보나파르트파와의 친분 때문에 정통왕조파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경쟁적인 이 두 파의 왕위요구자들을 화해시키려 하다가 나중에는 보나파르트파와도 사이가 멀어졌다. 내각은 1874년 5월 18일에 무너졌다. 3년 뒤(1877. 5. 16) 마크 마옹은 브로글리에게 새로운 내각구성 임무를 맡겼으나 이 내각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신공화파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으며(11. 20) 1885년에도 재선되지 못했다. 그뒤 정치를 포기하고 역사연구에 몰두했다. 〈회고록 Mémoires〉(2권)이 1938~41년에 출간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정치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